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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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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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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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던 날-
   (삶과 죽음의 찰나 0.001초)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이다.
어젯밤 꿈자리가 나쁘지도 않았다.
조상들 제사를 정성껏 모셨던 아내에게 왜 귀띔조차 없었을까?
선령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이다.
집을 얻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두 달 전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콘도를 중심으로 알아봤으나 마땅한 게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기한이 명년 1월 19일이기 때문에 11월 초순에 집을 얻지 못하면 나는 겨울 방학에도 귀국할 수 없다. 아이들의 겨울방학이 11월15일에서 12월31일까지어서 방을 구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귀국하였다가는 기한 내에 이사하기가 시간적으로 어려워진다.
항공권은 11월13일 것으로 발권을 마친 상태어서 마음은 더욱 바빴다. 네 식구가 함께 귀국길에 오르고 싶어서다. 누구보다 내가 더 그랬다. 혼자 남아서 집이나 구하려 다니기가 영 싫었다.

콘도에만 한정시키니까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가 버스 한 번 탈 수 있는 곳이면 HDB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촌의 벼룩시장’을 뒤졌다. 때마침 버스 인터체인지 근처 HDB에 살고 있는 한국인 세입자가 세를 놓는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여러 차례를 전화를 하던 끝에 연락이 닿았다. 오늘 밤 8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우리 내외는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저녁 밥상을 물리기가 바쁘게 버스 정유소로 나갔다.  
약속장소에서 그 집에 함께 산다는 아가씨를 만나 따라갔다. 집주인이 중국분인데 너무 좋다고 했다. 기한이 한참 남았는데도 직장 때문에 옮겨야 하겠다니까 그렇게 하라고 승낙하였다는 것이다.  
인터체인지에서 8분쯤 거리었다. HDB는 꽤 오래된 듯 했다. 엘리베이터는 덜커덩 거렸다.  복도식이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할 수도 없게 생겼다. 복도식은 처음 보았다.

스물 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이제 막 샤워를 하였는지 머리를 털고 있다가 우리를 맞았다. 우리를 마중 나온 아가씨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인상에 웃음이 없었다. 거실이라야 말 그대로 콧구멍만 했다. 방에는 자기들이 구입했다는 옷장이 있었고 20인치 TV가 전부였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겨우 들어 갈수 있는 크기에 색 바랜 변기가 기분을 잡치게 했다.    아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눈짓을 했다. 그런데도 월세는 1700불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은 작년에 1400불에 들어왔는데 주변 렌트비가 올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인터체인지를 끼고 있어 좀 비싸다는 설명이다. 아파트 구조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들은 언제라도 나갈 수 있다며 얻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집에서 나왔다. 콘도와 구형 HDB의 차이가 확연했다.

인근 승송마트에 들어가 채소와 과일 등 간단한 시장을 보았다. 버스를 탄 시각은 9시 5분 전이다. 시장바구니 비닐봉지 3개는 내 몫이다. 버스 안에서 나는 ‘아무래도 열흘 안에 집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내가 남을 수밖에 없겠다고 했다. 아내도 그럴 것 같다고 했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정유소에 도착했다. 횡단보도를 걷고 있을 때다. 늘 그랬듯 내가 두 발걸음 앞서 건너가고 있었다.  
갑자기 오른쪽이 환히 밝았다. 승용차가 쏜살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뒤돌아보는 찰나 ‘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내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가슴이 찢어지듯 모진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순간 아내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당신이 왜 이래“만 연발했다. 나는 울었다.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싱가포르에 가자고 했던 사람도 나였고 오늘 집을 보자며 데리고 나온 사람도 나였다. 내 자신이 그 날 만큼 미웠던 때가 없었다.
바로 옆에 집이 있는데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거릴 힘도 없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아내가 내뿜는 신음소리는 나의 심장을 도려냈다. 그저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다.
한참 뒤에야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젊은 아주머니가 아내를 내 품에서 낚아채듯 안으며 무슨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젊은 여인은 아내의 머리를 감싸 안고 부채질을 했다.

그제야 손녀에게 전화했다. 울먹거리는 내 목소리를 듣던 손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할아버지 왜요? 왜요?”를 연발하면서 같이 울먹거렸다.
“할머니가 교통사고 났어.” “집 아래야, 빨리 내려와 봐.” 손녀는 ‘엑’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영리한 손녀는 가디언에게 전화하고 내려왔다.
아내를 안고 있는 아주머니 이야기를 통역했다. 할머니가 잠들지 않게 하란다면서 “할머니”를 소리 높여 부르며 흔들었다.  
오토바이를 탄 경찰관이 나타났다. 때마침 가디언(guardian)이 보내서 왔다는 중년 부인이 경찰관을 맡았다. 사고 시간과 경위를 묻고 있었다. 머리가 꽉 막혀버린 것 같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부인은 통역을 하고 경찰관은 메모를 했다. 내 마음은 온통 앰뷸런스인데 오지 않았다. 경찰관이 불렸다고 하는데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진술을 하다말고 앰뷸런스를 외쳤다. 곧 올 것이라고 했다.

그 때서야 사방을 둘러봤다. 손녀와 손자는 할머니 곁에서 울고 있었다.
사고를 낸 차는 하얀 승용차다. 피해자 곁에 와보지도 안했다. 사고 차 옆에서 뒷짐을 지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저게 인간인가?’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멱살을 잡고 욕을 할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지만...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런 몰상식하고 비정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제야 차량 넘버를 외웠다. 현지인들은 그 신분이 무엇이든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데도 앰뷸런스가 나타나지 않는데 대한 불신이다.
아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몸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보, 힘내야 해.” “당신은 괜찮아. 착한 당신이 이럴 수가 없어.”
아내를 위로하면서도 세상이 원망스럽다. 남에게 싫은 말 한 번 하지 못하던 순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이 여인에게 어찌 이런 몹쓸 짓을 하는가?

내가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고가 난지 한참 뒤다.
어디가 얼마쯤 상했는지? 몸속 장기는 괜찮은지? 이러다가 죽는 것은 아닌지? 온갖 불길한 생각이 나를 미치게 했다. 경찰관은 가해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병원으로 빨리 옮길 조치는 뒷전이고 자기 일(조사)만 하고 있는 경찰관도 원망스럽다.
아내의 몸을 가만가만 만졌다. 오른쪽 다리는 손도 못 대게 했다. 순간 얼마나 망가졌는지, 또 한 번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경련이 일어났다.
그 때가지도 그 젊은 아주머니는 아내의 머리를 안고 있었다. 남편으로 보이는 가무잡잡한 청년이 걱정스런 눈으로 아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녀를 통해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고를 목격하였느냐고 물었다.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할아버지만 발을 동동 굴리고 있기에 도와주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참으로 고맙고 착한 사람들이다. 어디나 착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까. 나는 훗날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 명함을 달라고 하였더니 지갑에서 꺼내 주었다.

이 사이 가디언이 도착했다. 겁에 질린 내 얼굴이 가엽든지 큰일은 없을 것이니 진정하라며 위로의 말을 했다.
사고가 일어 난지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서야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검은 제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 네 명이 차에서 내렸다. 곧 들것을 가져와서 아내를 옮기려고 하자 아내는 그들의 손이 닫기가 무섭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들에게 제발 조심하라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아내의 다리와 허리 밑에 안전벨트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래도 아내의 비명은 여전히 나의 귓전을 때렸다.
들것에 옮기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힘들게 옮겨 앰뷸런스에 실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창이 제너럴 병원’(Changi General Hospital)이라고 했다. 가디언이 큰 병원이라고 해서 일단 안심했다. 나를 앰뷸런스 조수석에 타라고 했다.
  
앰뷸런스는 경적도 울리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너무 느려 답답했다. 아내는 핏기 없는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송장이 따로 없었다.
내 마음은 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리고 있는데 정작 앰뷸런스는 아직도 가고 있다. 굼벵이 중에 굼벵이다.
애간장을 태우던 앰뷸런스가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가디언도 따라왔다. 손자들도 우리 콘도에 사는 아주머니와 함께 왔다. 울먹거리고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손자들을 안심시켰다. “할머니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마.” 손자들은 내일 학기말 시험을 봐야 하는데 낭패다. 도대체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머리는 천 갈래 만 갈래 엉켜져 사리판단도 할 수 없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손자들 걱정을 했더니 아주머니가 자기 집에 데려다 재우고 내일 아침 등교하는 것도 챙겨주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일단 보냈다.

응급실은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영어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내가 들어간들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가디언을 들여보냈다. 어떤 상황인지 걱정스럽고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보호자 한 사람만 참관할 수 있다는 병원 규정에 짜증이 났다.
  엄격한 질서는 이해가 가지만 환자를 자기들 마음대로 다룬다 싶어 마음이 상했다. 그렇지만 절대 약자의 입장에서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서럽다.
응급실 복도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응급실 입구만 바라보며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데 정신도 오락가락이다.  
구급차는 계속 들어왔다.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 들어오는 청년도 있고 배를 움켜쥐고 들어오는 아가씨도 있었다.
넓은 복도의 의자마다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어둡다.

일시가 여삼추다. 30여분 뒤에 가디언과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사람이 나왔다. 응급실의 당직 의사였다. 대퇴부 골절이라고 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골절 정도를 확실히 알 수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위험한 상태는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죽음의 문턱은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것 같았다.
‘휴!...’
가슴이 터지도록 꽉 차있던 절망과 혼란의 응어리를 입 밖으로 쏟아 냈다.
‘이제 괜찮아 살았어, 살았다니까!’를 연신 중얼대면서 나 자신을 다독거렸다.
가디언도 천만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손녀가 전화 왔다. ‘할머니는 지금 어떠냐.’고 물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전화하면 안 되느냐고 했다. 내가 전화할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주머니 집에 따라가지 않고 우리 집에 있다고 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한 순간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평생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긴 너무나 가혹하고 긴 밤이었다.

                                                         <20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이 글을 쓰면서 열 번도 더 쉬었습니다.
사고 현장이 떠오르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찹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섰던 ‘아찔했던 충격’은 여전히 떨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타국에서 이처럼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겠습니까?
좋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시작할 때 생각은 일기 순으로 쓸려고 하였으나 과거의 일이면서도 현재 진행형도 있어 보시는 분들이 헷갈릴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상황 순서와 상관없이 파트별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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