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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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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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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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할아비의 길목에서-

4일 밤 3층 효서 엄마가 자장을 가져와 아이들이 맛있게 먹었다.
병원에 갔을 때는 아내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쌀밥과 닭찜을 모처럼 절반 이상 먹었다. 귀국을 앞두고 애를 쓰는 모습이다.
닥터 박이 왔다. 8일 귀국한다고 했더니 참 잘 되었다고 하면서도 서운 해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다. 한국에 오게 되면 꼭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자기도 1년에 한 번쯤 서울에 다녀온다고 했다.
간호사가 왔다. 하루에 대소변의 빈도를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해 손녀에게 전화 통역을 하도록 했다. 유학 온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고 5일이 되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와 캠코더를 챙겼다.
9시께 수술 담당의사가 X-레이 사진을 들고 왔다. ‘ㄱ자형의 쇠붙이(보철)가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도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실밥은 퇴원 당일 오전에 뽑겠다고 했다. 꿰맨 것은 부드러운 실이 아니고 가는 철사였다. 무지막지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든 수술이 잘 되었다니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환부의 치료도 아주 위생적이다. 소독면을 환부에 두 번 쓰지 않는다. 한 번 닦고 비닐주머니에 넣기를 반복한다. 좋은 인상으로 남는다.

아들과 가디언을 데리고 경찰서에 갔다. 입구에서 신원확인을 하고 들어선 곳은 한국 경찰서의 민원실 같았다. 남녀 경찰관 두 명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담당은 우리나라 중사 계급장 같은 갈매기 두 개를 단 젊은 남자 경찰관이다. 여권을 달라고 했다. 사진과 내 얼굴을 대조하더니 사건 경위를 물었다. 대답하면 가디언이 통역하고 그것을 그대로 워드프로세서 하는 작업이다.
시작에서 끝나기까지 30분이 걸렸다. 아들이 작성된 내용을 확인했다. 왼쪽 다리가 다쳤는데 오른쪽으로 되어 있어 정정했다. 아들이 한국의 보험사에 제출하겠다며 교통사고 확인서를 요청했다. 방금 조사한 조서를 그대로 출력하여 내밀었다. 그것이 확인서란다. 그리고 한 통 이상은 발급이 안 된단다. 모든 게 관공서 편의주의다. 참 희한한 나라라는 생각이 또 들었다. 여러 군데 제출하려면 복사해서 쓸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병원에 돌아왔을 때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5시에 집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니까 집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전갈이다. 손녀를 대기 시켰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대사관에서 또 전화가 왔다. 7시에  다른 한 팀이 간다는 것이다. 지금도 내가 왜 대사관에 그토록 염치없는 부탁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이 최소한의 예의마저 무너뜨린 것 같아 생각할수록 미안하다.
7시에 남자 세 사람이 와서 둘러보고 갔다고 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같다.

6일, 한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아들이 볶음밥을 만들어 엄마에게 먹였다. 여느 때처럼 병원식은 우리들 차지다.  
한국인 부동산에 전화했다. 콘도든 HDB든 버스 인터체인지 근처에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기대했던 주가는 떨어지고 달러 환율은 올라 SGD는 900선을 넘어 905원이다. 병원비부터 부담이 커졌다.
항공기 안에서 입을 옷과 신발을 챙겼다. 모레 저녁이면 떠난다고 생각하니 벌써 서운한 기분이다.
아들은 병원에 어제까지 총 10,000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8일 퇴원 전에 한 번 더 정산한다고 했다. 부르는 게 값이라더니 내라는 게 병원비다.
아내는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바깥나들이를 했다. 장족의 발전이다. 항공기 탑승 워밍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에 집을 보려 왔다. 못 보던 에이전트가 사람을 데리고 왔다. 월 2500달러면 얻겠다고 했다. 지급보다 무려 800달러가 내려간 제안이다. 무산 되었다.
내일 병원에 가지고 갈 아내의 반지 목걸이와 화장품을 챙겼다.
밤 9시에 경찰관이 병원에 왔다. 아내에게 사고경위를 물었다. 경찰관은 조서용지에 펜으로 썼다. 진술자의 사인까지 20여 분만에 끝났다. 아내 다음에 내가 심문을 받았다. 꼬치꼬치 켜 묻는 것도 없다. 묻는 대로 적고 사인하면 끝이다. 그렇다고 현장조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사고 당시 현장에 나왔던 경찰관의 조사로서 끝나는 모양이다.
가해자인 운전자 입장에서는 좋을 것 같다. 자기의 주장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가장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신호등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점멸상태에서 일어난 횡단보도 사고는 100% 운전자의 과실이라고 했다.
어제 가디언이 말하던 횡단보도 사고는 무조건 운전자 과실이라는 말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신호등이 꺼져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고라면 운전자의 과실이 적거나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운전자가 거짓 주장할 여지가 있는 교통법이다. 내일 변호사가 온다니까 다시 확인할 생각이다.
경찰관은 조사를 끝내고 ‘병원에서 진료기록이 경찰서에 오면 법원으로 넘기고 그 결과를 피해자에게 우편으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법 절차 역시 한국과는 판이했다.  

뜬눈으로 지새운 7일은 밝았다.
아내의 귀국을 앞둔 간밤은 길고도 곤욕스러웠다. 만감이 교차했다. 싱가포르를 올 때부터 사고까지의 일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왜 우리는 몹쓸 사고를 당했어야 하는지 곰곰이 따져보기도 했다. 아무리 되돌아봐도 남에게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었다. 운명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억울했다.
털고 일어나 병원에 나갔다. 아내의 상태는 나아지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닥터 박이 또 왔다. 완치해서 돌아오라고 했다. 만날수록 정겨운 사람이다.
소연, 효서, 선우 엄마가 밥과 나물국과 찐빵을 가지고 왔다. 따뜻한 이웃사촌이었다.
변호사와 함께 오기로 했던 가디언은 소식이 없다. 기다리다 지쳐 전화했더니 모임 때문에 못 온다고 했다.
교통사고 손해배상 시효는 3년이기 때문에 변호사비 보증금 2000불씩 미리 걸고 선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완치될 때까지 들어간 치료비를 근거로 소송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래 변호사비는 운전자가 가입한 보험회사에서 나오는데 피해자의 과실이 많을 때에 대비하는 것이 보증금이라고 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대사관을 통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휠체어를 샀다. 250달러를 주었다는데 괜찮았다. 장난 끼 많은 손자가 시승을 했다.  

더디어 귀국하는 8일이다.
지금 한국은 무척 춥다고 했다. 나는 아내와 손자들의 초겨울 옷을 챙겼고 아들은 병원에 갔다.
이웃 동에 사는 ‘시경 엄마’가 죽을 써 왔다고 손녀가 전화했다. 할머니가 빨리 나아서 동네 분들과 바비큐파티를 하기로 하였다고 했다. 꼭 그래야만 되겠다. 몽땅 신세만 지고 가버려서는 안 된다.
실밥도 뽑았다고 했다. 의사가 ‘굿’이라고 하더란다. 복용약 1주일분도 받고 추가 병원비도 주었다고 했다.
총 11,000$ 들어갔다. 최종 정산하여 남는 돈이 있으면 아내 계자로 송금한단다. 아내가 가입한 보험사에 보험금 청구를 하기 위한 진단서도 받았다고 했다.
집을 보는 사람들을 기다리느라고 오후 늦게 병원에 가야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퇴원 준비가 모두 끝났었다. 아내는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검정 바지와 꽃무늬 검정셔츠를 입었다. 이제 원래의 모습이 어설프게나마 살아난다.
외부 앰뷸런스를 100$에 불렸다. 병원 앰뷸런스를 이용할 수도 있는데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고 여러모로 불편하다고 했다.

앰뷸런스는 약속시간 8시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다. 건장한 중년 남자 두 명이 왔다. 능숙한 솜씨로 아내를 자기들이 가져온 휠체어에 안정하게 태웠다.
아내의 병상 바로 앞에 있던 할머니와 바이 바이를 했다. 간호사들과도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12일만의 퇴원이었다.
아내와 아들과 손녀는 앰뷸런스에 타고 나와 손자는 가디언의 승용차에 탔다.
내가 창이공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앰뷸런스가 먼저 도착하여 짐을 부치고 있었다. 항공사에서 휠체어를 가져와 옮겨 태우는데 까지가 앰뷸런스의 역할이었다.
비즈니스 손님에 대한 항공사 직원의 고객예우는 극진했다.
아내 때문에 지체할 수 없어 모두 출국장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밥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라.’는 당부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내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성한 몸으로 왔다가 상처만 안고 돌아가는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 목이 매여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자식들이 있다지만 내 만 할까? 아내와 함께 귀국하여 돌봐주고 싶은 마음 한량없지만 집을 세놓아야하고 또 얻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손을 흔들고 뒤돌아서는 마음은 아팠다.

기러기 할아비의 길목에 들어서는 날이었다.
국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발길은 무거웠다.
그래도 나는 가야 한다. 아무도 등 떠미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견뎌내야 한다.
비록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말벗도, 이웃도 없는 적막한 곳일지라도 그저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다.

                                                                               <25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귀국 후 첫 글이군요. 끊임없이 성원하여 주시는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과분한 말씀을 주신 키플링 님, 불사조 님, 새콤달콤 님 너무 감사합니다. 얼마나 위안이 되고 의욕을 북돋아 주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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