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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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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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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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 묻혀가는 일기장 속에서-

오늘은 일요일이다. 7월의 마감도 이제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힘들었지만 보람도 느끼고 고달프기도 하였지만 즐거움도 있었던 지난날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지난해 2월7일은 음력 1월1일 설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새벽같이 일어나 설쳤을 손자들이 8시께 늦밤에서 깨었다.
녀석들도 오늘이 설날이라는데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집안이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어찌 설 맛이 나겠는가? 손녀가 동생에게 빨리 세수하고 세배하자고 독려했다. 보나마나 아빠 엄마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으라고 하였을 것이다.

손녀는 분홍색 바탕의 색동 치마저고리가 있는데 손자는 없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느라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모르는 것이다. 할머니가 며칠 전부터 찾아봐도 없었다고 한다.
네 식구 가운데 한복이 있는 사람은 딱 하나 손녀밖에 없었다. 나는 캠코더를 삼각대에 고정시켰다. 우리 내외는 거실 베란다를 등지고 앉았다.
손녀 손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우고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라며 큰 절을 했다. 우리는 ‘우리 손녀 손자 항상 건강하고 착하게 자라세요.’라고 답례를 했다. 그리고 미리 챙겨두었던 세뱃돈 10불씩을 주었다. 좋아 했다.

나는 손자들에게 북동쪽을 향해 아빠 엄마에게 세배를 하라고 했다. ‘아빠 엄마, 항상 감사하고 사랑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라고 주문했다. 동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녀석들도 캠코더 촬영에 자주 주연을 맡다보니 카메라 의식 않고 자연스레 잘 했다. 그리고 아빠 엄마가 주는 것이라며 또 10불씩을 주었다. 손자들은 졸지에 20불씩 벌었다며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설빔도 복조리도 웃어른 찾아 드리는 세배도 없는 그야말로 말뿐인 설이었다.
아내는 국을 끓이고 나는 가래떡을 썰었다. 아침밥은 떡국을 먹었다. 설 맛을 내 보려는  속내다.
한국에서 큰 아들 내외와 막내로부터 새해 인사가 왔다.

형식이지만 이렇게 되면 사실은 이중과세가 된다.
아내와 손자들의 출국직전인 양력 1월1일 설을 쇠었기 때문이다. 양력설을 쇤 것은 처음이었다. 싱가포르에 가서 살게 되면 겨울방학 때 귀국할 수밖에 없어 사실상 설은 쇨 수가 없어서다. 양력 1월1일도 방학 기간을 하루 넘겨야 했다.
설은 우리에게 있어 상당한 의미를 담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동기간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모여드는 동생과 조카들은 잘해야 1년에 한두 번 만날 볼 수 있을까 말까다.

우리는 매년 설을 앞두고 성묘를 가는데 이번엔 싱가포르 출국 때문에 예년보다 앞당겨 갔다. 조상에게 고했다. ‘조상님의 손들이 먼 나라로 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내외가 따라가게 되어 올 해부터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를 양력 1월1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라고...
우리 내외는 조상에게 이렇게 예를 올리고 싱가포르에 들어 왔었다.
타국에서 맞는 첫 설인지라 만감이 교차했다.
손자들 덕인지 탓인지 모르겠다.

이미 각오는 했지만 쓸쓸한 마음만은 감출 길이 없다.  
‘이 나이에 타국에 나가 살아야하나?’라고 말했던 아내의 넋두리가 늘 내 맘속에 맴돌았다.
아내는 한국에서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던 터다. 친구간의 계모임만 다섯 군데에다가 ‘수영 동호회’의 회장도 맡고 있어 하루도 집에 있을 날이 없었다.
집에 있는 날에도 10분이 멀다하고 찌르릉거리는 전화 벨소리에 잠시도 쉴 사이가 없었다.   나는 때론 불편하고 불만스럽다. 나 혼자 집에 있는 일은 다반사다.
그렇다고 미안스러워 하거나 부담을 느끼는 아내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불평스런 내색은커녕 어떻게든 재미있게 놀러 다니라고 권유하던 터다.
이런 상황에서 싱가포르에 왔으니 어찌 내 마음이 편하고 신경을 끊을 수가 있겠는가. 황후같이 모셔도 시원찮을 입장이다.

사실 나는 젊었을 때 이런저런 핑계로 놀만큼 놀았다. 집만 지키며 세 아들 녀석 키우는데 청춘을 다 바친 아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보상을 해야 하고 보상받을 자격이 충분한 아내기에 그렇다.
지난 회의 설거지 타령도 이런 연유가 한몫 했던 것이다. 흔히들 늙으면 올 데 갈 데 없어지니까 할멈 치맛자락 잡고 늘어진다고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런 축에 끼기는 싫다.
아직 나는 내가 할 일이 있고 마음 또한 젊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 오게 된 것도 내 나름의 자신감으로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어쨌건 원단은 열렸고 나이는 확실하게 한 살을 더 보탰다. 설이 담고 있는 의미처럼 묵은  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에 서서 내일을 기약해야 한다.

설 기분은 시내 한복판에서 내어보기로 했다. 무작정 시티홀에서 내렸다. 중국인들이 가장 큰 명절로 꼽는 설(春節)의 행사는 폭죽을 터트리고 홍빠오를 돌리는 것인데 공개된 장소에서는 볼 수가 없다. 한국에서도 그렇기는 하다. 기껏해야 정월 한 달 동안 간간히 이어가는 지신밟기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형편이다.
시티 몰에 들렸다. 중앙에 위치한 원을 중심축으로 매장이 배치되어 있다. 1층에서 꼭대기까지 펑 뚫린 공간의 한 가운데는 에스컬레이터가 배치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매장은 넘쳐나는 상품으로 현란하다. 아래 위층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아내는 내심 명품 가방을 찾는 듯 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는 백화점이 생각났으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에게 다음에 고급 브랜드 백화점에 가보자고 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싱가포르 몰의 내장건축은 하나같이 원형이다. 이 같은 건축 유형은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말레이시아 건축양식인 것 같았다.

우리는 무작정 지하상가를 걸었다. 통로 양쪽에 늘어선 점포들은 눈요깃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한참 들어갔을 때 바깥 출구가 나타났다. 첫 번째로 눈에 부딪친 건물은 컨벤션센터였다. 그 유명하다는 두리안 지붕의 건축물이었다. 싱가포르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에 이어 두 번째 보는 풍광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바다와 맞닥뜨려 있는 황토 빛 강물너머 싱가포르의 상징 머리이언상이 연신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 넷은 강가를 거닐었다. 내 주특기인 사진도 찍고 캠코더 촬영도 했다. 손자들은 야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두리안 건물 안쪽에 들어서자  한국음식점 고려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한글 상호와 메뉴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되돌아 나오면서 빵으로 요기를 했다.  

밖에 나가면 진득이 못 있는 아이들 때문에 곧장 집으로 와야 했다. 다음 코스는 콘도의 풀장이다. 새파란 물이 풀장 가득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매혹의 물결이었다. 아이들은 옷을 벗기가 바쁘게 풍덩풍덩 뛰어 들었다. 아내도 뒤따라 들어갔다. 손녀 손자는 입수하자마자 물장난이다. 서로 물을 퍼 씌우며 킥킥거렸다. 아내의 수영솜씨는 유연했다. 몸의 탄력이야 퇴색이 연역했지만 물을 가르는 폼은 괜찮았다. 나 역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말라 찌들어진 몸매를 들어내 놓기 싫어서 참았다.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듯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풀장을 휘젓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 안락의자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군상들, 딱 벌어진 어깨에 터질듯 한 허벅지 근육을 뽐내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들이 늙은이의 기를 꺾었다. 나도 한 때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나는 더 이상 물가에서 서성거리기도 민망해 야자수와 어우러진 전원수의 사이 길을 거닐었다. 잘 다듬어진 전원수 사이사이마다 이름 모를 형형색색의 꽃들은 이방인의 눈과 코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린이 풀장에도 서 너 살쯤 돼 보이는 꼬마들이 물장구치며 노닐고 있다. 물맞이 시설이며 원통 미끄럼틀이며 샤워실은 물론 찜질방까지 완벽에 가까운 시설이 코리언들을 유혹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콘도의 임대료가 비싸기는 하지만 시설로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열 달 동안 단 한 번도 풀장을 이용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았다. 늙은이의 열등의식과 점잖을 빼야하는 케케묵은 사고가 내 자신을 옥죄고 있는 것이다. 일그러진 어떤 행동도 용납되지 않는 고정관념이 제동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두 녀석들은 즐겁고 시원한 오후 한 나절을 보냈다.

손녀 손자와 아내는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많이 걷고 수영까지 했으니 제법 고단했던 모양이다. 역시 나는 집에서도 외롭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세 얼굴은 평화롭다.
방과 거실을 오가며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침대에 걸쳐 눕자 철부지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 흐른다. 어릴 적의 모습은 언제나 곱고 아름답다.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추억의 한 복판에는 어릴 적의 설이 있다.
섣달로 들어서면 어머니가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우리들의 옷이었다. 목화를 재배하고 따온 목화씨를 발라내고 솜을 타고 실올을 뽑는 과정은 하나같이 어머니들의 몫이다. 실낱에 풀 먹이고 베틀에 얹기까지의 과정은 어머니들의 정성과 눈물이다. 검정 물을 들이고서야 한숨을 내쉬던 어머니들의 모습은 눈물 되어 내 가슴을 후려친다.
겨울 옷감으로 만들어진 투박스런 무명베는 곧바로 바느질집으로 향한다. 치수는 나이와 체격으로 엄마들 입에서 결정된다.

그 때 우리는 설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설 차례 준비는 몇 달 전에서부터 늦게는 보름 전에 끝난다. 우리들의 설 옷도 열흘 전이면 입어보게 된다. 학생복 비슷한 검정 무명옷을 입고 너무 좋아 팔짝팔짝 뛰었던 기분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재현할 수가 없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던 이밥의 달짝지근한 맛이며 빨강 홍옥의 달콤새큼하면서 향긋한 맛은 여태껏 찾아보지 못했다.
가물가물 떠올랐다 무심하게 사라져 가는 60년 전의 추억이다.

지금 젊은이들이야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그토록 힘들게 우리를 키웠고 우리 또한 가난의 고통 속에 오늘을 버텨왔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데 자식은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4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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