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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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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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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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에게?-

지난해 1월 중순의 일이다.
아내 명의로 콘도를 계약하고 입주했다. 나는 보름 뒤에 왔다. 아내와 손녀 손자는 극심한 소음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마 100데시벨은 넘을 듯 했다.
싱가포르에 둥지를 틀자마자 당하는 일이라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낯선 땅에서 부딪친 첫 시련이었다. 예상 못했던 일에 맞닥뜨리게 되니 짜증스럽기도 하고 두려웠다.  
한 달 남짓 버텼으나 더는 자신이 없었다. 2년을 살기에는 심신이 망가질 것 같은 위기감에 숨이 막혔다. 집주인과의 대화는 이 때부터다. 해약을 요구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내미는 배짱에 마음만 상했다.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려대도 집 주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헛수고에 그쳤다. 하자를 모르고 계약을 하였더라도 계약서에 서명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싱가포르라고 했다.

깊은 시름 끝에 선택한 곳은 한국대사관이었다. 무턱대고 다이얼을 돌렸다. “지나친 소음 때문에 불면증을 앓고 있다”고 호소했다. 계약할 당시는 문을 닫은 상태에서 에어컨이 켜져 있어 심한 소음을 느끼지 못했다는 상황설명도 했다. 집 주인에게 해약을 요구했지만 콧방귀만 끼고 있다고 호소했다. 눈치코치도 없이 애타는 심정을 마구 토해 냈다.
대사관 여직원은 난감하고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너무 미안했다. 사소한 일로 전화하여 죄송하다고 했더니 대답은 단호했다.
“크든 작든 자국민의 이익과 보호를 위해 대사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한 마디에 눈이 번뜩 뜨이고 힘이 솟구쳤다. 대한민국의 국민임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대사관의 ‘양경희’분과 수많은 통화가 오갔다. 그리고 계약기간 2년을 반 토막으로 자르는 성과를 거뒀다. 엄청난 심적 고통에서 한 숨 돌렸다. 참으로 큰 도움을 얻었다. 그분의 이름만 떠올려도 늘 정겹고 든든했다. 관료가 아니라 가족이었다.

두 번째 맺어진 인연은 한인회다.
한인회가 마련한 ‘08년 경노위로연’ 때다. 외국생활의 첫 발을 내딛자마자 뜻 깊은 자리에 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얼떨결에 맞은 자리였지만 너무도 소중한 자산과 추억을 선물 받았다. 싱가포르 한인회가 한인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역할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가 싱가포르에 체류하고 있다는 증명서를 한국에 제출할 일이 생겼다. 한인회에서 증명서를 발급받고 우송까지 맡겼다. 영어는 물론이고 우체국이 어디에 있는지, 편지는 어떻게 붙이는지도 모르는 나에는 과히 구세주였다. 한인회의 존재가치를 절실하게 느꼈다.
그럼에도 한인회원으로 선뜩 가입하지 못했다. 한시적인 체류가 첫 번째 이유였다. 영주권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일로 치부했다. 참여의 의미도 개미법칙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기적이고 용렬스런 사람들의 인식이 나를 통해 그대로 들어나고 있었다.
“내 하나쯤 한인회에 가입하지 않아도 잘 돌아갈 터인데 굳이 100달러나 드려서 가입할 필요가 있겠는가?”
힘은 모을수록 배가된다. 그 힘의 과실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간다는 평범한 이치를 팽개친 크나큰 실수였다.  
조기유학을 택할 수 있는 생활능력이라면 아주 적은 돈일 수도 있는 회비다. 친구와 점심 한 끼 먹는 돈이다. 단 1년을 살아도 우리의 자산을 불리어놓아야 한다는 트인 의식을 놓쳤다. 싱가포르 교민이 번창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이웃 그리고 나의 행복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인색한 자신에 대해 내 삶을 반추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역시 지난해 10월 하순이었다.    
셋집을 비어주어야 할 기간이 2개월 정도 밖에 없어 마음이 바쁠 즈음이다. 소음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고프기도 했고 집 주인과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도 마음을 뜨게 했던 참이다.
안식구와 함께 집을 보려 나갔다. 낮에는 사람이 없어 밤 8시에 만나봐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찾던 집은 아니어서 금방 되돌아섰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보고 걷고 있었다. 쏜살같이 달려든 승용차에 아내가 받혔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대퇴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 때 도움을 얻을 곳은 역시 가디언과 한인회 그리고 대사관밖에 없었다. 싱가포르의 교통사고 관련법은 우리나라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도 이들로 통해 알게 되었다. 유능한 한국인 변호사를 선임하게 된 것도 이 모든 분들의 도움이었다.
병원입원과 수술 그리고 가해차량 운전자와의 치료비 청구에서 경찰조사와 보상에 이르는 모든 문제가 현금과 변호사만이 해결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데 놀라웠다.
이 때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한인회에 다가서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너무 실망했다. 일찍이 한인회의 회원이었다면 얼마나 떳떳한 위치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을까?  

갑자기 세상을 뜬 어느 할아버지의 장례를 지켜봐주고 갈 곳 잃은 그 미망인에게 7,000달러에 이르는 위로금을 거둬준 것도 한인회였다.
한인회는 교민과 함께 가는 명실상부한 우리의 동반자라는데 이의의 여지가 없다.  
길고도 먼 인생에 있어 언제 무슨 일이 내 앞에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에 있어 ‘설마’는 없다는 것이다.
그 ‘설마’에 대비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을 깨우치는 게 삶의 지혜다. 나에게 있어 크고 작은 일련의 사건들이 자칫 놓칠 수 있는 실수를 따져보게 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우리를 지켜줄 곳은 대사관과 교민회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주싱가포르 김중근 대사와 봉세종 한인회장의 만남을 두 번 보았다. 물론 공식석상에서다. 그분들의 사이는 너무 절친하고 격의 없는 모습이었다. 참 흐뭇했다. 두 분의 돈독한 친분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교민들의 권익과 발전을 도모하는 앙상블이다.

내가 늦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는 평범한 이치를 되뇌며 한인회의 문을 두들긴 것은 넷   달이 채 안됐다. 뭉개버린 양심을 복원하려고 나선 걸음은 상쾌하고 가벼웠다.  
40여년의 긴 세월을 통해 마련한 한인회의 단독 건물은 한국교민의 저력이자 자존심으로 다가와 어깨가 으썩했다. 우리건물에 우리만의 도서관을 대면하는 순간 나의 양식은 풍요롭다.
어디 이뿐인가. 언제 발생할지 모를 사건 사고에 대비한 변호사 무료상담은 한인회의 획기적인 서비스다. 회원만이 누릴 수 있는 이벤트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물론 비회원도 상담를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교민이라면 회원 가입이라는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마땅하다. 아니 떳떳하고 후련하다.  

  오는 10월24일 “한인 연합체육대회”가 Serangoon Stadium에서 열린다. 주 싱가포르 대사관, 싱가포르 한국학교, 한국상공회의소(싱가포르), 민주평통(싱가포르)가 후원하고 한인회가 주최한다.
단체경기로 축구, 족구, 줄다리기, 줄넘기, 발야구, 계주가 있어 교민들의 친목과 화합의 한마당이다. 100m 달리기, 단축 마라톤은 자신의 체력과 인내를 시험하는 심신 계량은 물론 운동의 생활화에 크게 기여하는 기회다. 특히 통 굴리기, 인공위성, 공중부양 달리기 등의 가족경기는 가족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 가족 간의 교류와 체력단련에도 큰 몫을 제공할 동기부여다.  
나는 지난 5월16일 열린 “2009 한인가족 한마당”에서 디카 촬영대회에 참가하여 영예의 대상을 받았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거움이다. 자기의 재간이 인정받는 뿌듯함도 있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거리인가. 뜻 깊은 체험이었다.
이번 체육대회도 많은 기념품과 서울왕복항공권, 가전제품 등 푸짐한 상품이 걸러있는 행운권 추첨도 있다고 한다.
이어서 싱가포르 주재 대한민국대사관이 주최하고 싱가포르 한국학교가 주관하는 제5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11월21일(토) 14:00, RELC에서 실시된다고 한다.
가족나들이로 이것저것 나누고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는 존재다. 그래서 가족을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고 나라를 세운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상하의 이국땅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목적이야 어떻든 우리민족이 남의 나라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잘 살아야 한다. 남의 나라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과 가족과 나라를 위해서도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첫째 조건이 대동단결이다. 이스라엘 국민이 왜 강한가? 똘똘 뭉쳐있어 그 작은 나라의 국민이 어디서나 큰 소리 치며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대통령도 거의 평생을 국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의 귀국 첫 연설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후세에 귀감이 되는 명연설로 기록되어 있다.
누구보다 자녀유학을 위해 이곳 싱가포르에 나와 있는 교민들은 교류의 폭을 넓혀야 한다. 2년 이상 체류하는 경우라면 무조건 한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를 권유하고 싶다. 부모는 물론이고 자녀들의 폭넓은 교류를 위해서 꼭 필수불가결의 일이다.

보다 넓은 공간에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같은 콘도에 살면서도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는 것은 불행이다. 우리나라 땅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싱가포르는 모두 알고 뭉쳐도 2만 명이다. 세대로 치자면 몇 천 가구에 불과할 것이다. 직장인이라면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할 것이고 유학생은 여러 학교에 다닐 것이다. 이들이 자연스런 만남을 통해 각양각색의 정보를 공유하고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것은 삶의 지혜이자 자산이다.
이제 국외생활의 외로움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이웃을 돕고 도움을 받는 인간다운 삶의 광야에 나서야 한다. 한민족의 대단함을 만인에게 과시하며 마음껏 누려야 한다.
그 첫 단계가 한인회의 멤버로 등록하는 일이다. 정말 권고하고 싶다.

다행스럽게 지금 한인회의 봉세종 회장의 의욕은 대단하다. 교민들의 권익신장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구상하고 또 실천해 나가고 있다. 한국 대사관과 현지인들과의 접목에 심혈을 기우리는 모습에서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안타까움이란 교민들의 뒷받침 때문이다. 선장에게 힘을 실어줘야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다. 그 힘은 가벼운 격려의 말 한 마디와 적극적인 참여다. 많을수록 좋다. 이런 경우를 두고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부터 기업들이 꾸려가는 한인회에서 교민들 모두가 더불어 끌고 가는 한인회로 거듭나야 할 때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다.
내가 싱가포르 사교장에 잇따라 나갈 수 있는 기회도 봉세종 회장의 교민들을 위한 각별한 배려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10월1일 싱가포르 최고 호텔 ‘Shangri-La에서 가지는 개천절 기념행사를 통한 현지 인사들과의 교류에 참여하게 되었다. 자신을 추스르는 값진 기회다.  

한인회 가입서를 작성하고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을 때 내 손은 당당했었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라고 할까!
이제부터 ‘설마, 나에게’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겠다. 한인회라는 내 집 울타리가 있고 든든한 대사관이 내 뒤에 버티고 있지 않는가.  
이 글을 쓰는 오늘의 싱가포르 하늘은 유난히 맑다.
싱가포르 교민들에게 아주 좋은 일들이 다가오는 예감이어서 참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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