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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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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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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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육대회 참가기-

10월24일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2009 한인 연합체육대회”가 개최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 이번 체육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첫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체육과는 거리가 먼 손자를 데리고 나가는 일이었다.
손자는 1주일을 꼬드기어 나가기로 했다. 절룩거리는 할머니와 셋이서 한 번 뛰어보자고 했다.
21일 밤 손자와 함께 인터넷을 뒤졌다. 행사장인 Serangoon Stadium으로 가는 버스 행선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집에서 세 정유소를 가면 58번 버스가 있었다. 문제는 아내가 세 정유소를 걸어가야 하니까 걱정이다. MRT를 이용하면 쉽지만 버스와 MRT를 세 번이나  번갈아 타야 했다.
22일 저녁에 58번 버스를 탔다. 세랑군 운동장 앞에 가는 버스가 맞다. 그런데 우리 집 앞에서 가는 60번과 연결이 되지 않아 실망했다.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연결버스를 알아보려 탄 것이다. 영어만 잘 했더라도 할 필요가 없는 생고생이다.
한인회 사무국장으로부터 우리 집 5분 거리에 있는 정유소에서 22번이 있다는 정보를 알았다. 어디서건 도시생활에 있어 교통정보는 필수다. 시간과 돈과 수고의 절약이다.  
  
23일은 부푼 꿈으로 밤잠을 설쳤다. 물병도 다시 씻고 얼음도 점검했다. 캠코더와 카메라 충전도 했다.  동영상과 카메라에 나만의 추억을 마음껏 담고 싶어서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추억 나눠주기도 재미 가운데 하나다. 모르는 길은 일찍 나서는 게 상수다. 내일 6시에 일어나 7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9시 시작이지만 버스길의 소요시간도 모르고 정확한 위치도 모르니까 서둘러야 한다는 조급증과 완벽주의의 발작이다.
5시에 일어났다. 아내와 손자도 동틀 무렵 눈을 떴다. 오늘 따라 무척 덥다. 날씨는 청명했지만 더위가 만만찮다.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나섰다. 7시5분에 버스에 올랐다. 싱가포르 버스에는 정유소 알림 서비스는 없다. 안내 방송도 정광판도 없는 것이 이 나라의 서비스 수준이다. 하기야 눈과 귀가 어두운 나에게 안내가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답답하다. 큰 동네의 이름은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BLK로 표시되어 있어 여간 지리가 밝지 않고는 무용지물이다.

버스를 타자마자 신경이 곧추섰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싱가포르 버스 정유소의 이름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은 글자로 보기 쉽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버스 노선표지판위에 큼직하게 붙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20분을 달린 시점에서 손자가 기사에게 물었다. 세랑군 인터체인지 앞에서 내리라고 했다. 그래서 내렸는데 다시 타라고 했다. 한 정유소를 더 데려다 주었다. 300여 미터 거리에 있었다. 기사가 고마웠다. 7시 35분에 내렸으니까 운동장 주변은 한산하고 쓸쓸하기까지 했다. 현수막도 이제 막 걸고 있었다. 출입구에는 도우미들이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줄 안내문과 선물을 쇼핑백에 넣고 있었다.
그런데 운동장 사정은 달랐다. 축구 예선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참가 팀이 많아 7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볐다. 하지만 어설프다. 헛발질이 더 재미있기도 하다.        
봉세종 한인회장은 수건을 목에 건채 행사진행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녹색 재킷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많아 보기 좋았다.

우리는 관람석 중앙 뒤편으로 올라 자리를 잡았다. 의자를 들어다가 아내와 손자를 앉혔다. 기온은 자꾸 오르는 느낌인데 바람은 없다. 팸플릿으로 부채질을 해도 소용이 있을 리 만무다.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덥냐고 짜증을 냈다. 참 부질없는 날씨 탓이다.
8시가 지나고 9시에 접어들자 교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침밥을 먹지 않고 온 터라 시장기가 아랫배를 두들겼다. 꾸르륵 소리를 내며 밥을 재촉했다. 때마침 봉사자들을 위한 김밥이 도착했다. 염체불구하고 팩 하나를 얻었다. 손자 녀석이 거의 다 먹었다. 먹성이 좋아 ‘먹 돌이’로 통하는 녀석이니 오죽 하겠는가. 준비했던 얼음물은 금방 바닥이 났다. 한인회가 마련한 물병은 온수에 가깝다.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느리다. 손자 녀석이 주리를 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서둘러서 생고생을 한다며 할아버지 탓도 했다. 할 말이 없다. ‘남자는 인내심이 강해야 하는 거여’ 하지만 이 말이 통할 리 없다.
아무리 봐도 10시 개회식 때까지도 견뎌내지 못할 것 같다. 입구에 내려가 선물 백을 얻어 왔다. 행운권도 챙겨 놨다. 그리고 손자에게 할머니 잘 모시고 집에 가라고 했다. 좋아했다.   가면서 하는 말 ‘아시아나 항공권 타와’다. 서운하기는 하였으나 심적 부담이 덜어 편했다.

축구 예선 4개 팀의 경기가 끝나고 개회식이 시작됐다. 김중근 싱가포르 대사와 직원들이 참석했다. 교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한국학교 학생들의 학년별과 동서로 양분한 청,백군으로 나누어졌다. 운동장 한 쪽에서 식단까지 걸어 들어오는 행진이 경쾌한 팡파르에 발맞추어 진행됐다. 국민의례에 이어 한인회장의 기념사와 대사의 축사 그리고 선수 선서와 건강체조를 끝으로 개회식은 막을 내렸다. 첫 경기는 대사관과 공기업간의 친선 축구대회로 필드에서 펼쳐졌고 트랙에서는 초중등 100미터 달리기와 엄마 100미터 달리기가 이어졌다. 엄마들은 더러 자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즐겁다. 참가하는 것만으로 상품이 주어졌다. 싱가포르에 있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협찬이 많았다. 교포 의료팀도 응급치료 자원봉사에 나섰다.
초등단체 타이어 끌기와 YMCA 에어로빅 공연은 흥을 돋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요즘 노래 못하고 춤 못 추는 사람 없다더니 정말 잘 추었다. 원더걸스의 노바디 춤은 절정을 이루었고 앙코르가 연발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경기는 이어졌다. 다들 나름대로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왔다. 도시락과 라면을 사 먹기도 했다. 미풍이 불기는 했으나 상하의 무더위는 위력이 대단했다. 소나기도 없었다.
뙤약볕에 땀 흘리는 재미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돈 주고도 못 흘릴 땀 빼기다. 나는 오늘 직업 사진사가 된 느낌이다. 개회식을 시작으로 나의 캠코더와 디카가 정신없이 작동됐다. 어린이 축구와 한국학교 학생들의 사물놀이 공연도 인기 만점이었다. 어린이들이 출전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엄마 아빠의 응원이고 사진 찍기다.

아내와 손자가 빠진 것이 못내 아쉽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러 뛰놀았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여성의 티볼은 처음 보는 경기다. 가느다란 막대기 위에 공을 얹어놓고 야구방망이로 공을 치는 경기다. 즉 여성 야구경기다. 재미있는 광경이 끊임없이 연출된다. 죄 없는 막대기만 치다가 아웃 되기도 하고 공이 손아귀에 들어왔는데도 놓치기 일쑤다. 잡고 던지기 실력이 제로에 가깝다. 하기야 언제 필드에 나섰겠는가. 그래서 우습고 즐거운 것이다.
가족게임으로 인공위성과 공중부양달리기도 재미중에 하나다. 자녀들과 어울러 치르는 경기치고 웃음이 없는 경기는 없다. 단체 줄넘기와 줄다리기도 기와 힘의 대결로 볼거리다.
단체 줄넘기는 호흡이 맞아야 하는데 현장에서 발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수 연발이다. 동서군 힘 대결인 단체 줄다리기는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다. 두 번에 걸친 줄다리기에서 백군이 영패했다. 서쪽 분들의 힘이 셌다.

성인족구와 골프 샷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체육대회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기가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남녀청년과 장년 노년이 참가하는 경기다. 60세 이상 노인 참가자를 불렸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55세 이상으로 연령을 낮추자 한인회장과 대사가 나섰다. 전임회장과 중년 몇 사람도 몸을 풀었다. 사무국장이 나더러 한 번 뛰라며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긴 바지에 긴팔차림이 어서 1200미터를 뛰기는 모양새도 아니고 무리가 뻔했다. 그런데 손자 생각이 났다. 내 복에 행운권 당첨은 꿈도 못 꿀 일이고 달리기라도 해보자는 객기가 한순간 발동한 것이다. 카메라를 국장에게 맡기고 출발점에 갑자기 섰다. 몸 풀기 예비 운동도 못한 상태다. 얼떨결에 달렸다.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았던 400미터 트랙은 멀었다. 반 바퀴 지점에서 숨이 가쁘기 시작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바지는 다리에 감겨들었고 긴소매는 두 팔을 휘감았다.
반바지와 반소매로 운동 차림을 제대로 한 대사와 회장이 한 바퀴를 돌고 주저앉았다. 나는 정신없이 남녀청년들과 뒤엉켜 그저 뛰었다. 청년들은 두 바퀴 더 도는 2000미터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 바퀴에서 만족해야 했다. 숨이 목에 찼다. 마라톤에 참가할 수 있었다는데 만족해야 했다. 청년과 여자 마라톤 시상식이 끝났다. 마지막 시상은 장년 마라톤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경기진행자가 나에게 3등을 하였다며 불렀다. 전혀 뜻밖이다. 이유는 완주자가 두 사람밖에 없었고 그 다음이 나라고 했다. 3등자리에 섰다. 트로피에 상품을 받았다. 마라톤 참가자 가운데 가장 연장자라며 덤으로 상품 하나를 더 주었다. 나이 많다고 상품을 더 받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달갑잖은 덤이다. 어쨌든 기분이 괜찮다. 손자를 떠올리니 너무 좋다. 손자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어서다.

마지막 순서는 행운권 추첨이다. 혹시나 하고 침을 삼켜봤지만 역시로 끝났다. 복에 겨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복권을 사지 않는다. 노력과 실력으로 산다는 게 삶의 철학이다.
특히 이 날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촌 생활기’에서 글로서만 만났던 팬이었다. 단 세분밖에 볼 수 없었지만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한인들의 침목과 단합의 한 마당은 종합점수 1위인 백군이 우승컵을 거머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참 뜻  깊은 만남이었다. 싱가포르의 추억 가운데 세 손가락에 꼽힐 만하다.  
승용차로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고마운 분도 있었지만 마음만 받고 사양했다. 버스의 시원스런 에어컨도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땀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집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샤워를 했다. 손자는 짐 보따리를 풀었다. 트로피를 보고 달려왔다. 이게 뭐냐고 물었다. 읽어보라고 했다. 마라톤 상패라는 것을 알고 깜작 놀랬다. 어떻게 된 것이냐며 눈이 휘둥그레 졌다. 사실을 말해도 믿지를 않았다. 나는 한 술 더 떴다. 손자 네가 지켜봐 주고 준비만 되었더라면 1등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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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룰루랄라님의 댓글

룰루랄라 (araba79)

재미있는 후기 너무 잘읽었습니다..^^저도 가보고싶었는데..선뜻나서지를 못했네요..^^;;

피닉스님의 댓글

피닉스 (wisethink)

제대로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어영부영 시간을 놓쳐 참석을 못한 게 아쉽네요. 모처럼 선생님 다시 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는데^^  다음 몸살림 운동에는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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