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 ~

  • 1,441
  • 사람 사는 이야기-(7)

페이지 정보

  • 남강 (h12k13)
    1. 3,912
    2. 1
    3. 3
    4. 2010-01-21

본문

   -어느 기러기 엄마의 思父曲-

어제 어느 기러기 엄마의 가슴 깊숙이 사무치는 사부곡이 전달돼 나만이 읽고 말기에는 너무도 애틋한 사연이라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까지...
그제께 ‘한국촌 생활기’에 들어갔다. 쪽지 메시지 신호음이 울렸다. 열어보니 가끔씩 쪽지도 주고 댓글도 달아주는 정겨운 기러기 엄마였다.
그 엄마의 글을 간추려보면 이렇다.

-제1신(쪽지)-
<전략> 저는 지난 화요일아침.... 건강 안 좋으시던 친정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그 날 저녁 한국으로 급하게 날아갔지만,,,,,,
수요일 새벽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이미 가시고 영정만 남아,,,,
아버지와 작별하고 어제 밤 다시 싱가폴로 돌아왔어요...
너무 깊은 슬픔에.... 자주 뵙지 못하고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 딸만 넷 중 맏딸로... 제 살기 바빠서,,, 불효한게 너무너무 가슴이 찢어집니다....
가까이 있는 시댁에 최선을 다하느라 늘 친정 부모님은 뒷전으로 하고 살았던 20년의 세월이 너무너무 한이 되고 후회되어 가슴이 갈갈이 헤어지는듯합니다......
너무너무 많은 후회의 눈물을 쏟아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 왔어요..
급하게 연락받고 가면서 한국의 고3과 같은 ,,,11학년인 큰아이만 남겨두고 한국도착해서 할아버지 상태 보고 큰아이한테 연락하려했던 것도ㅡㅡㅡㅡㅡ 너무 후회가 됩니다...
남겨두고 갔던 큰아이는 결국 외할아버지 가시는 것도 못 뵙고,,,,, 여기 혼자 남아 학교 다니면서 혼자 깊은 슬픔을 안고 있어야 했어요...
이번 28일 싱가폴 오실 예정이었는데 결국 못 오시고 말았네요... 그동안 못한 거 이번에 오시면 정말 잘해드리려고 단단히 준비 하고 있었는데,,,,,,,
한국서 남아서 엄마 곁을 지키고 싶지만 상황이 이러니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제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늘,,,, 선생님 글 보면서 우리 아버지도 생각 참 많이 하면서 건강하지 않으셔도 그냥 곁에 살아 계셔주시기만을 그리도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아무말씀도 없이 황망히 가버리시네요....<후략>

-제2신(이메일)-
<전략> 친정아버지께 잘해드린 게 하나도 없는데 너무 갑자기 허망하게 가버리시니 흔히들  말하는 대로 억장이 무너집니다...
말없이 늘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안계시다고 생각하니 폭풍우 몰아치는 폐허에 혼자 버려진 기분입니다.....
저는 딸만 넷중 맏딸이면서 시댁에선 맏며느리입니다..
친정은 일산,,, 시댁은 분당 ,,,,,바로 5분거리에 살면서 시댁에만 메달려 사느라 친정 부모님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시어른은 입원하시면 밤샘을 도맡아하고 간단한 감기에도 병원 모시고 가고 시댁일이라면 제가 다 하면서도 ,,,
정작 친정아버지 병원에는 한 번도 가본적 없는 불효녀입니다...
2008년 여름 ,, 친정아버지는 대장암으로 대수술을 2번이나 하셨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폐기종 천식으로 그리 건강이 좋지 않으셨구요..
호흡기가 안 좋으셔서 호흡기 장애 판정을 받으신 분이 대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으니 체력이 바닥이 나셔서 그이후로 늘 조마조마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싱가폴온지  6개월 남짓 되어 아이들과 정착하느라 아버지 수술하셨는데도 한국에 뵈러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요..
그 후로도 응급실에 여러 번 실려 가셨어도 한 번도 가뵙지 못했구,,,
2008년 12월과 2009년 6월~7월에 한국 다니러 갔어도 시댁에 메어 있느라 잠시 잠깐 아버지 뵈러 친정집으로 가서 뵌게 전부 였어요...

남편 미국 유학시절부터 한국에 다니러 와도 시댁에서 주로 지내야 했구 친정에는 도착하고 며칠 후 잠시 그리고 돌아가기 전 잠시 들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싱가폴에서 한국 다니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구요...
시댁에선 그게 당연하다고생각하셨기에 제가 친정 가 있겠다고 아예 여쭈어 보려고 하질 못했었어요.
결혼 하고 20년동안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때 같은 날은 당연히 시댁에 가서 지내고 ,,,  맛있는 음식 준비해놓고 이제나 저제나 저와 아이들 오기를 기다리셨던 친정 부모님이었습니다...
한 번도 그런 특별한날 함께 지내본 적 없고 ,,,
명절 다음날 친정 가면 ,, 시댁서 많은 일하고난 뒤라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누워서 잠만 자다오곤 했습니다..

시댁에는 집에서 코스별로 음식해서 요리사처럼 음식 차려내기를 밥 먹듯 했어도,, 정작 친정아버지 따뜻한 한 끼 진지 해드린 적 없는 나쁜 딸입니다...
시댁가까이 살아서 일부러 친정 부모님은 저희 집에 잘 오시지 않았어요....
정말 어쩌다 일 있어 오셔도 딸 밥하는 거 힘들다고 밖에서 밥 사 주셨구요...
싱가폴로 떠나오기 전 아이들 본다고 2시간 운전해서 시댁으로 오셔서 물 한 모금 안 드시고 10분 아이들 보시곤 집으로 돌아가셨던 친정아버지 생각에,,,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고 ,,, 못해드린 게 죄스럽고 후회스러워 통곡을 합니다....
지난여름 방학 때 다니러 가서 잠시 뵙고 돌아올 때,,

그냥 지금 그대로만 유지하면서 계셔주세요,,,,하고 인사드리고 ,,,다음 여름방학 때 올께요 하고 인사드린 게 마지막이었습니다...그것도  떠나오기 며칠 전 잠시 들러서요...
지난 가을 건강관리 잘해서 저와 아이들 보러 오신다고,,,,,,, 1월 28일 싱가폴에 다녀가신다고 예약도 해 두었더랬는데,,,,
그래서  많이 걷지 않고 차에서 내려 바로 식사할 수 있는 좋은 식당,,, 발마사지 할 곳 미리 다 알아놓고,,,
오시면 가볍게 입으실 얇고 보드라운 스웨터도 사놓고 20년 동안 못해드린 거 조금이라도 해드리려 맘먹고 있었는데,,,,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게 하늘나라로  떠나 가버리셨어요..

이번 겨울 들어 너무 춥고 신종플루 돌아서 걱정 많이 하고 집에서만 거의 지내셨는데도 벌써 응급실 한번 다녀오시고,,
이번에는 집에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가셨는데  해외에 있는 딸들 아버지 뵈러 오는 거 기다리시지 못하고  그만 떠나신거지요..
딸 넷 중  셋째 하나만 아버지 임종을  지켰어요..
아버지 장례 치르면서도 이건 꿈이라고 이건 아니라고 하고 싶었어요...
장례 치르고 삼우재 치르고 바로 담날 큰아이만 남겨두고 갔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싱가폴로 급히 돌아와야 하는 제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발이 안 떨어지고 ,,, 망연자실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너무 힘들어 하고 슬퍼 하는 친정 엄마 곁을 지키면서 있고 싶었는데..
현실은 저를 싱가폴로 돌아와야만 했어요..
깊은 슬픔에 탄식과 눈물만 나오는데 다시 싱가폴 기러기 엄마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너무 너무 버겁기만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 다 학교 보내고 한없는 슬픔 주체 할 수 없어서  이렇게 얼굴도 뵌 적 없는  선생님께 실례를 무릅쓰고 편지 드립니다.....<후략> (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여러 분은 위의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떠올릴까?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이토록 애끓는 사부곡을 부르고 또 부를까?
지난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의 12회에서도 ‘빨강 권투글로브를 낀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한바 있다. 그 때의 반응을 보노라면 착잡하다. 공감을 이끌어 낼만한 부족한 글 솜씨가 첫 번째 이유이겠지만 아버지의 이야기가 별로 와 닫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역시 그 축에 끼어있다는 느낌이 곧 잘 들 때가 많다.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고 어머니는 사랑의 여신으로 비춰진 우리의 정서가 그래서 그럴 것이다.
위 엄마의 절규에서 나는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지만 갔을 때는 이미 영정만 있었다.’는 독백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딸만 넷의 맏딸이면서도 지척에 계시는 부모님을 뒷전으로 하고 20년을 살았다’는 회한에 가슴 저미는 아픔을 느꼈다. 아들에게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고 이 달 28일 싱가포르에 오시면 그 동안 못해 드린 것 모두 해 드리려고 단단히 벼렸다는 구절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싶어 비통하다.
우리는 언제나 늘 사정이 여의찮으면 내일로 미루고 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아마 이 엄마도 그랬을지 모른다. ‘설마’라는 막연한 자위수단에 맡겨버리고 말이다.    
  
어쨌든 부모를 여읜 자식의 마음은 애달프다.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니까. 그것은 생전에 못다 한 자식 된 도리의 회한이다. 우리는 늘 부모에 대해 자식의 도리를 다하리라고 다짐하면서도 실제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건과 시간 탓이다.
그렇지만 그 실은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 부모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식들의 당신을 향한 마음가짐 하나면 그만이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잘 해 드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만한 여유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들이기에 관심 하나만 바라보는 것이다.
부모들은 누구나 자식에게 짐이 되기를 싫어한다. 자식의 고통은 곧 자신의 고통,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고 자식이 힘들면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느 부모의 마음이다. 말하자면 자식의 행복은 자식들만의 몫이고 오로지 불행만이 당신의 몫으로 여기면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유학길에 함께 오른 소위 기러기 엄마 아빠들이 느끼는 부모를 향한 마음은 어떨까? 보고 싶다고 해서 쉽게 볼 수도 없고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어도 달려갈 수 없는 처지에서 미안함을 느낄 것이다. 죄의식마저 들어 안타까울 것이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분의 경우는 이미 효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와 반대로 부모는 관심 밖으로 떠나버렸고 자기 눈앞의 자식밖에 모른다면 그것이 곧 불효인 것이다. 자식이 부모 되고 그 부모가 자식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 세상이치인데도 우리는 예사롭게 잊고 사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머지않아 자식으로부터 공경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자주 효도를 강조하고 나서는 것은 내 자신이 불효자였기에 그 씻을 수 없는 후회 가 너무 커서다.  
나에게 있어 나의 아버지는 늘 원망의 대상이었다. 남들처럼 배부르게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하면서 권위만 세웠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지금 회고해도 우리 아버지는 그렇다. 그래서 힘든 삶은 어머니가 독차지했다. 자식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보따리 장사를 했다.

내가 직장을 다니고 밥을 먹을 만할 때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힘들까봐 함께 살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아버지도 그랬지만 자식들에 대한 불만은 많았다. 술 담배를 즐겨 드셨던 터라 그 때 형편으로서는 만족스럽게 못 해 드렸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해야 인정받던 시절이어서 자식과 아버지와 자리를 함께 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물론 아들들과도 상당한 거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는 그마저 생각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가정을 꾸려야 했고 세 아들을 교육시켜야 하였기에 뒤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핑계였다.
아내는 요즘도 시아버지를 회고할 때면 ‘막걸리 한 잔에 그토록 만족하고 좋아하셨는데 자주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에 목말라 하셨지는 안했을 것이다. 자식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웠을 것이다. 자식들과 도랑도랑 이야기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지금 내가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은 퇴근할 때면 아버지께 다가가서 그 날의 이야기를 들려드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단 10분이면 충분할 것을 그 10분에 인색하였는가 하는 회한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쏟아져 내리는 눈물은 강물이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등졌을 때 그 때서야 알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힘들게 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효도나 효부상을 받는 것도 마다할 것이다. 그저 몇 마디의 문안전화 한통이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나는 두 며느리가 보내온 문안 편지 두 통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중히 아주 자랑스럽게 보관하고 있다. 조금 서운하다싶으면 곧 그 편지를 생각한다.
이 글을 읽은 분들도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정성이 가득 담긴 편지를 써보았으면 한다. 전화로 정겨움을 나눌 수도 있지만 아들딸과 손주 그리고 며느리나 사위가 손수 써 보내는 편지는 분명 최고의 선물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감흥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최고의 선물을 당장 부모님들께 드리기를 소망해 본다.

                                                                                              <8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쪽지와 이메일을 보내주신 분께 심신한 위로의 말씀을 거듭 드립니다. 사전 승낙을 얻지 않고 님의 글을 옮겨 쓴 무례를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도 애절한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 여겨져 많은 기러기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6회에 댓글을 달아주셔서 용기를 북돋아 주신 레몬트리 님, 웃자 님, chris 님, 싱숭생숭 님, 캔디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기사가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 버튼을 눌러주세요! 다음 기사작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댓글목록

제이싱님의 댓글

제이싱 (paik1220)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 이번명절에 한국 가려고 하는데 홀로계신 엄마에게 따뜻한 밥한끼 지어드리고 오렵니다. sabina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간절하면 꿈속에서라도 뵐 수 있을거에요

레몬트리님의 댓글

레몬트리 (bead73)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납니다.... 부족한 딸 자식 타국에 보내놓고 걱정스러워 날마다 편히 잠 못 주무시는 부모님... 제발 건강해 주시길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랍니다.

캔디님의 댓글

캔디 (mieco)

어른이 되어 부모님 맘 헤아릴 나이되니 부모님은 어느새 여행도 힘드실 연세가 되셨더군요 아이들 한테 여행이 산교육이라며 다니면서 내부모 한번 뒤돌아 보지못한 그세월이 부끄럽고 가슴아파 눈물만 흐릅니다....

오늘의 행사

이달의 행사

2024.04 TODAY
S M T W Y F S

가장 많이 본 뉴스

  • ~

서비스이용약관

닫기

개인정보취급방침

닫기

이메일무단수집거부

닫기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