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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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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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강(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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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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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의_오랜_친구들과_여행____이지로_올림.JPG

         열하루간의 일기
  - 할머니가 싱가포르에 가기까지 -

2008년 1월 2일,
싱가포르 손녀가 야밤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손녀는 ‘너무 외롭다’고 했다. 제 아빠가 전화를 받자마자 울었다. 마음 약한 가족들이 편할 리 없다. 식구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들은 모레 당장 가봐야 하겠다며 항공권을 서둘러 예약했다. 아내가 12일 싱가포르 행 항공권을 사 둔 상태인데도 아들은 당황했다. 하기야 먼저 가서 하숙집 생활을 정리하는 절차도 밟고 이사할 집도 알아봐야 하니까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얼마나 처량했으면 잠 못 이루고 전화를 하였을까? 손녀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나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전신이 오싹했다. 너무 안쓰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며느리는 사춘기에 신경이 과민한 것 같다고 했다. 열 두 살이니까 그럴 법도 하다. 그렇지만 아빠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칠까?
아들 내외는 셋집을 얻든, 콘도를 사든지 하자고 했다. 당시 원만한 콘도 값은 SGD 50만 달러 정도였으니까 체류 기간을 최소 2년에서 5년으로 잡는다면 매입하는 것도 충분한 고려 대상이었다. 집세 주는 돈이면 약간의 융자를 받는다 해도 집세 대비 이자가 집세보다 싸게 친다는 계산이다.
아내는 어리둥절한 눈치다. 2년도 겁이 나던 터인데 5년이란 말이 나오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아들 내외의 생각에 동의했다. 어느 나라할 것 없이 부동산에 투자하여 손해 볼 일은 없다. 비록 나라는 적지만 경제 성장세로보아 싱가포르에 한 자리 잡아 놓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다음 날 아내는 친구들과 여행길에 올랐다. 경주 감포에서 여장을 풀었다고 했다. 감포는 횟집으로도 유명하지만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문무왕 (661-681)의 수중릉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동해안은 아내의 단골 여행지였다. 친구들이 헤어지기 전에 하루 밤 함께 지내자고 한 것이다. 아내는 무척 바빴다. 친구들 등살에 집에 있을 시간이 없다. 이제 헤어지면 열 달 뒤 겨울방학 때나 만날 수 있으니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들은 싱가포르에 들어갔다. 손녀 손자들 때문에 집안이 온통 난리다.
아이들은 참 좋은 시절에 산다. 외국에 드나드는 게 우리가 어릴 적엔 어디 상상이라도 할 일이든가. 고개 마루 하나 넘어 고모네 집에 다니려 가는데도 1년에 한 번이 어려웠다.
나는 아내가 싱가포르에 가져갈 약품과 마른 반찬거리를 챙겼다. 손녀 손자가 좋아하는 과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지난 해 여름 방학 당시 아이들과 성묘 갔을 때 찍은 동영상을 편집했다. 한려수도의 아름답고 우아한 풍광이 잠시 나를 붙들었다. 추억의 음악을 배경에 깔았다. 손자들이 보면 좋아 할 것 같아서 보내줄 요량으로 서둘었다.
자정에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들의 도착 전화다. 시차 1시간이 늘 헷갈리게 한다. 주인집 부부와 아이들이 창이공항에 마중 나왔다고 했다. 아빠와 딸과 아들의 만남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평소에도 딸과 아빠의 사이는 유별났다. 밤이면 딸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은 거의 아빠가 도맡았기에 그런가 보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정성이 더 들어간 자식이면 남다른 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제들 곁에 와서 함께 살기로 하였다니 손주들은 생기가 돈다고 했다. 남의 집에 돌아다니기를 1년 반 가깝게 하였으니 좋아할 것은 보나마나 뻔하다.
두 달이 멀다하고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 다녔지만 정에 목마른 아이들의 갈증을 온전히 풀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들은 다음 날부터 아이들이 등교하면 집구하기에 나서고 학교에서 오면 외식도 하고 쇼핑도 한다고 했다. 하숙집 딸들의 시샘 때문에 우리 손주들이 옮길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주인은 무척 미안스러워 하고 협조적이라고 했다. 솔선해서 집을 알아봐 주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던 아내는 큰 아들과 손녀를 만나 저녁을 사주었다면서 귀가했다. 이렇듯 아내는 정든 이들과 작별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소식은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아이들이 인근 콘도의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그 틈을 이용해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생각만큼 집을 구하기도 사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짧은 시간으로는 어림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 내외가 외국에 나간다니까 동생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쏟아졌다. 도시락 값도 주었다. 아내는 싱가포르에 간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준비하는 모습이다. 병원에서 검진도 받고 몸단장도 하였다.
그런데 또 마음이 바빠졌다. 아들이 귀국하려니까 손녀가 또 울었다는 전화다. 나도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참 답답했다. 나는 얼마동안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 아내와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아들에게 말했다. “너무 힘들면 한국에 가자”고 으름장을 놓아보라고 했다. 궁여지책이다.
아내는 손녀가 자꾸 운다는 말을 듣고 난감해 했다. 우리가 제들 곁에 있다고 하여 손녀의 마음을 다 채우지는 못할 것인데 그 때마다 전화하여 불평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도 맞는 말이다. 여태 없던 일이다.

며느리는 이 말을 듣고 문제는 아빠의 여린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정에 너무 치우쳐 아이들을 연약하게 키운다는 이야기다. 부부지만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도, 교육관도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아들 내외가 부딪치는 일은 거의 본적이 없다. 의견 조율을 잘하고 산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19일부터 일주일 간 휴가를 잡아 두었으니 그 때 어머니와 함께 들어가자고 했다. 내일 아이들 아빠가 귀국하면 집을 사는 문제에서부터 몇 년을 싱가포르에 머물 것인지 여러 가지로 의론하겠다고 했다.
아들 내외가 원하는 데로 따라갈 내가 아니지만 손자들의 문제이기에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그 놈의 정 때문이다.
아내는 이번에는 동해안의 백암온천 행이다. LG 직원 리조트에 간다고 했다. 자주 가는 곳이다. 이번에도 역시 친구들과의 이별 여행이다. 이민 가는 것도 아니지만 늙은 여인들의 마음은 왠지 아주 헤어질 것 같은 섭섭함과 두려움이 그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듯 했다. 참 좋은 친구들이다.
아들이 귀국했다. 아이들에게 아주 한국에 가자며 속마음을 떠받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란다. 유학은 원래 손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사춘기가 겪어야 하는 일시적인 증후가 맞기는 맞는 것 같다.

할머니가 곧 들어오신다니까 너무 좋아하며 금방 평온을 되찾더라고 했다. 딸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편하게 귀국하였다는 것이다.
하숙집 주인이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손자의 학교도 가까이 있는 동쪽의 콘도를 알아봐 주기로 하였다고도 했다.
콘도를 매입하는 것은 시간상 도저히 안 되니까 일단 셋집에 살면서 나더러 알아보라고 했다. 많은 정보가 필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팔 때를 염두에 둬야 하니까 저렴하면서도 선호도가 높은 지역은 물론 콘도의 명성이 절대 기준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세를 놓기도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는 게 아들 내외의 판단이다.
그리고 아내가 먼저 들어가야 되는 이유는 이렇다. 싱가포르 법은 아빠나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비자 발급이 안 된다는 것이다. 비자가 있어야 주택 임차도 할 수 있고 전기, 수도 계약을 비롯해 인터넷, 전화, TV 등 생활필수 요건을 갖출 수 있어 시간이 바쁘다는 것이다.
아내는 원래 계획대로 12일 싱가포르에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이다. 아이들이 마중 나와야 하니까 토요일로 잡은 것이다. 이 사실을 온천장에 있는 아내에게 말해 주었더니 천만다행으로 그저 ‘알았다’는 가벼운 반응이다.

아내는 출국 이틀 전에 귀가했다. 피로해 보였다. 7시간씩 차를 타는 여정이었으니까 그럴 것이다. 아내가 가져갈 가방에 비상약과 여름 옷가지를 챙겨 담았다. 손녀가 전화 왔다. 할머니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으며 한참 통화 했다. 창이공항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는 것 같았다.
무료 수탁무게인 20킬로그램을 넘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자정을 넘겼다. 나는 무엇보다 공허해 질 수 있는 아내의 마음을 달래고 힘을 실어주는데 안간힘을 써야 했다.
1월 11일 동사무소에 나가 영문 주민등록등본을 발급 받았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학생의 가족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의 신용카드도 가장 오래 사용한 두 개만 남겨두고 모두 반납했다. 휴대폰도 12일 자로 장기 정지신청을 하는데 항공권 카피를 요구했다.
오전보다 오후의 일기예보는 더욱 나빠졌다. 당초 인천국제공항까지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직행버스를 이용하기로 했으나 불안했다. KTX로 바꾸었다. 고르지 못한 한겨울 날씨가 걱정거리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인척과 친구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전화가 밤에도 이어졌다. 이토록 출국전야는 뒤숭숭한 가운데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더디어 출국하는 12일은 어김없이 밝아 왔다. 비 내리는 고속도로와 국도를 거쳐 밀량역에 도착하자 숨 돌릴 겨를도 없이 9시13분발 고속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었다. 18량의 긴 등치는 속력에 탄력을 붙였다. 그칠 줄 모르는 궂은비가 차창에 부딪치며 아주 작은 수포로 깨져갔다. 만감이 교차했다.
배웅하려가는 내 마음이 이런데 오늘 이국만리 낯선 남의 나라 땅을 향해 가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착잡할 것이다. 다 늙은 마당에 손주들의 뒷바라지라니 어이없을 수도 있다. 풍습도 딴판이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가 두렵고 불안하였을 것이다.
서울역에 도착하기까지 아들 며느리의 전화가 여러 번 왔다. 미안스런 표현일 거다.
성질 급한 나의 날 샌 몸놀림 덕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였다. 원했던 앞좌석의 통로 쪽 표를 얻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기웃거렸으나 썩 마음에 내키는 메뉴가 없었다. 입에 익숙한 육개장을 먹었다. 공항 은행에서 싱가포르 달러를 환전했다.
아내는 화장실에서 여름옷으로 바꿔 입었다. 상하의 나라에 간다는 실감이 났다. 공항 대합실에는 여행객들로 부쩍 거렸다. 언제나 그렇듯 떠나는 사람마다, 보내는 이들마다 제 각각의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헤어진다는 이별의 아쉬움과 애틋한 아픔은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하나같을 것이다.  
아내가 출국장을 빠져나가 뒷모습을 감춘 뒤에야 겨우 되돌아 설 수가 있었다. 몇 발짝 걷다말고 다시 되돌아갔다. 대형 유리창 앞에 섰다. 행여 잊어버린 것이 있어 되돌아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심증이 작동한 것이다. 쓸쓸히 사라져가던 아내의 그림자를 붙잡고 한 시간을 우뚝이 서 있었다. 가장 슬픈 이별의 장소가 항구라고 하였지만 공항의 이별도 만만치 않았다. 이별이란 언제나 이런 것인가?


                                                                 <토요일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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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ky님의 댓글

sky (haseo78)

또 일등이네요.. 어쩜 글을 이렇게도 잘쓰시는지.. 한편의 소설을 읽는것같아요.. 토요일을 기다립니다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그렇군요. 저는 더없는 고마움이고 반갑기 그지없지요. 무엇보다 저가 글을 올리는 보람이자 힘이지요.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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