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 어떻습니까?
좋은 일도 있고 힘든 일도 많지요. 세상사 모두 그런 것인가 봅니다.
독자 몇 분께서 지나간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서 시리즈로 올려주면 보기도 쉽고, 좋은 추억으로 되새김할 수 있겠다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한국촌’의 지면을 허비하는 것이 아닐지 염려되어 망설였습니다마는 이곳에 처음 오신 분들도 많으리라 여겨져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제목은 예전 그대로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로 하였습니다만 분량은 애초보다 좀 줄이고 다듬었습니다. 일단 15회 정도로 간추려 매주 토요일과 화요일에 올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횟수는 여러분들의 요청에 따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유학생활에 도움이 되고 기러기의 삶에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합니다. 댓글로 많이 성원하여 주시고 유학 생활기도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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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 가던 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슴 설레었다-

이것저것 챙기고 또 빠뜨린 것은 없는지 부산을 떨었다. 반소매 셔츠, 반바지, 팬티 등 의류에서부터 운동화, 슬리퍼, 우산은 기본이고 김, 미역, 멸치, 고춧가루, 미숫가루까지 챙겼다. 무료 화물량이 한 사람당 20Kg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항공기 휴대 물량에 맞추느라 넣었다 빼내다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체중계에 삐딱하게 걸쳐 얹어 본들 제대로 계량이 될 리 만무다. 3Kg 초과까지는 봐준다니까 그것만 믿고 갈 뿐이다.
손주들과 마누라를 만나러 간다는 즐거움과 상하의 타국생활을 경험하게 된다는 기대와 두려움이 묘하게 교차했다. 지난해 1월의 싱가포르 더위는 견뎌 낼 만했지만 가장 덥다는 5, 6월은 얼마나 더울까? ‘사시사철 더운 나라에서 어떻게 살려고 가느냐’며 가지 말라고 말리던 친구들의 만류가 귓전에 맴돌던 밤이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 길밖에 없다며 마음을 다잡았던 밤이기도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거리다가 일어난 시각은 새벽 4시.
공항리무진을 타야 할 시간까지는 무려 6시간이나 남았다. 원래 느긋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그만큼 설레었던 밤이었다. 화분에 물을 주었다. 어항에 평화롭게 노니는 물고기 밥도 주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볼 수 없는 정든 친구들이다. 아니 오늘도 살아 있음을 서로 확인하는 요긴한 사이다.
아침은 긴장과 피로가 몰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귀밑에 멀미약을 붙였다. 짐을 하나라도 더 가져가겠다고 아무리 요령을 부려도 결국은 여행가방 하나에 아이스박스 한 개다. 노트북, MP3, 카메라, 캠코더는 기내휴대품으로 양쪽 어깨에 걸쳤다. 청바지에 두터운 점퍼 차림이 내 나이에는 좀 어색했다. 하지만 청바지는 계절과 상관없고 점퍼는 벗어 버리면 더운 날씨라도 무방하다는 계산된 차림새다.
떠나올 때 며느리의 ‘너무 죄송해요.’그리고 건강 챙기라는 인사를 받았다. 국내선과 국제선을 같은 항공사로 이용하니까 김해공항에서 원스톱 체크인카운트로 끝낼 수 있어 참 편리했다. 우려했던 화물은 무려 6Kg이나 초과했지만 그저 봐주어서 무척 고맙기도 하고 미안했다.

날씨가 참 좋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산하는 그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답다. 산허리를 휘감고 도는 뭉게구름도 산골짜기마다 촘촘히 자리 잡은 촌락은 어쩌면 그토록 싱그럽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지. 잠시나마 볼 수 없어서일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보딩타임까지는 무려 2시간 반이 남았다. 고마웠던 친지들에게 한 번 더 감사의 마음을 휴대폰으로 전했다.
여느 때와 같이 오늘도 공항청사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보면 볼수록 놀랍다. 규모가 그렇고 시설이 또한 그렇다. 매년 세계 최고 공항상 (안전 서비스 시설 등)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992년 착공하여 2001년 3월 29일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하루 500여 편의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세계 유수 공항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민간항공운항 60년사의 결산이기도 하다.

일단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공항 음식 값은 좀 비싸다. 최하 7천원이다. 라면은 잘 안 먹는 식성이라 큰맘 먹고 1만 원짜리 비빔밥을 청했다. 옆 좌석의 노랑머리 부인이 우리나라 비빔밥을 먹고 있어 신기하고 고마웠다.
창밖의 거대한 항공기를 바라보며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손자가 좋아하는 울릉도 엿집이 생각난 것이다. 1만원어치를 사서 휴대용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음 코스는 요새 젊은이들이 말하는 S라인 미녀들을 만나 볼 수 있는 면세점이다. 곱디고운 여직원들의 미모와 휘황찬란한 조명등의 만남은 ‘숨 쉬는 예술’이다.
마냥 기웃거리기만 하고 지나칠 수 없어 국산 스킨과 로션 두 개를 17만5천 원에 샀다. 아내로부터 예쁨 받을 선물이기는 하지만 비싸다. 이래서 미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쭉쭉 빠진 노랑머리 파란 눈의 남녀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분도 좋고 고맙기도 하다. 외화수입을 보는 듯해서다. 반면 출국하는 내국인들을 보면 국부유출이 염려스럽다. 내 주제는 망각한 채 말이다.

오후 4시 싱가포르행 비행기는 요란스런 폭발음을 신호로 이륙했다. 또 지루하고 고달픈 6시간을 견뎌 내야 한다. 장거리 비행에 가장 좋은 좌석이라는 비행기 날개 앞쪽 통로자리가 그래도 마음을 편하게 했다.
스튜어디스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앞치마로 변신한 스튜어디스들은 분명 바깥에서 보던 늘씬하고 교만스런 자태가 아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여염집 규수였다. 별의별 것에 혼란을 겪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여 얼른 머리를 가로젓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륙 직후부터 기체 흔들림(rolling)은 심했다. 멀미약효까지 겹쳐 어지러웠다. 신문도 대략 훑어보고 좌석 앞 모니터에 방영되는 영화 보기도 잠깐이다. 그래도 기내식은 꼭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은 통과의례였다. 그리고 커피 한 잔으로 기내 절차는 그런대로 모두 끝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지만 헛수고다. 그저 눈만 감았다 떴다 하면서 힐끔 힐끔 보는 것은 마이너스로 차감되어 가는 비행거리(4,624Km)와 남은 시간과 항속(h/k 700~920)이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편리한 세상일까, 편한 세상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쏜살같이 내달리던 하루가 오늘은 왜 이렇게 더딘지. 그래도 시간은 가고 약속된 장소는 어김없이 다가왔다. 비행기라는 문명의 이기를 실감하면서 적도의 나라 싱가포르 땅을 밟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중국어 안내 멘트, 시야에 들어오는 검은 얼굴과 뚱뚱한 몸매 그리고 오감을 자극하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열대지방임을 확실하게 알린다.
현지시각 밤 9시 30분.
싱가포르 입국장에서 90일간 체류할 수 있는 스탬프가 여권에 쾅 찍혔다. 뱃심 하나로 버텨야 할 싱가포르 생활의 그 시작이다. 두 손주가 손을 흔들어 댄다. 재미없기로 이름난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고…
짐 찾는 시간은 지루했다. 까만 벨트가 몇 번을 돌고 돌아서야 분홍색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쥐가 나도록 뚫어지게 보던 10여 분 뒤쯤에서야 카트기에 짐을 얹을 수 있었다.

드디어 사랑하는 손주들과 포옹했다. 두 손주와 싱가포르공항에서의 만남은 작년 12월 이후 두 번째다. 겨울방학 때 집에서 헤어진 지 불과 한 달이지만 감회가 새롭다. 양팔에 하나씩 끌어안고 ‘우리 똥강아지(손주들 애칭)들 잘 있었어’
나는 진짜로 아내와 진한 포옹을 하며 ‘여보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치솟지만 감정절제를 못하면 하급인간으로 여기는 아내에게는 철저히 속내를 감춰야 했다.
장사진을 이룬 택시가 쉴 새 없이 들이닥치고 꼬리를 문 인간 띠는 너 나 할 것 없이 제 갈 길을 찾아 사라져 간다. 목적지를 묻는 기사에게 주소를 알려 주는 손녀의 영어발음은 1년 전과 확연히 다르게 유창했다. 거무튀튀한 택시기사는 우리의 언행을 보더니 ‘코리언’이냐고 묻는다. 한국인들의 왕래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할 수 있다.

금세 몸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택시의 에어컨 바람은 이곳이 남국임을 확인한다.
불야성을 이룬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의 야경은 역시 야자수가 압권이다. 흐드러지게 핀 열대화가 조화롭다. 잠 못 이루게 했던 싱가포르의 셋집 콘도. 오색 스포트라이트에 번쩍
거리는 엄청 큰 입체 조각으로 새겨진 콘도 이름 Aquarius By The Park가 늙은 코리언의 기를 꺾었다. 고급스런 엘리베이터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정작 집 내부는 단순하다 못해 초라하다. 공간의 조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각상자의 구조물에 실망했다. 한 박자 쉬지 못하는 나의 급한 성격은 ‘이게 3천 달러(이하 싱가포르 달러)가 넘는 집이야’…하지만 ‘…3천 달러’까지의 악센트에는 힘이 들어갔지만 ‘넘는 집…’에서부터는 모기소리로 꼬리를 내렸다. 집을 얻느라 엄청 힘들었을 아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싸다는 생각은 두고두고 지울 수가 없다. 월세 3천3백 달러의 콘도라기에 아주 근사한 아파트로 인식되었었다. 인테리어도 화려할 것으로 그려 봤었다. 그래서 실망이 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법칙이 확인된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당시 환율(SGD 700)로 환산하면 월 2백30만 원의 셋집이기에 제법 큰 환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32평 크기에 내부치장은 볼품없었지만 거실과 방 3개, 주방, 그 가운데서 화장실 3개가 불만스런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게 했다. 주방 뒤쪽의 조그마한 화장실은 메이드용이었다. 싱가포르의 웬만한 집은 인근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들어온 가정부를 두고 사는 집이 많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무더움 속의 화려함’과 ‘엄청 비싼 집세’라는 양면의 첫인상에서 싱가포르 생활의 서막은 올랐다. 노후에 벅찬 숙제를 안겨 준 채 말이다.

                                                                  <2009.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