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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맛깔 (karchizor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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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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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향기 







어린 시절부터 내가 스물 한 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마루턱 우리집의 정원은



600여평으로 비스듬히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정원이라기 보다는 사실, 우리의 생계 터전이었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는 기억하지 못해도 생생한 몇 가지는 지금도



내 가슴에 그림으로 저장되어 있다







묘목을 구해 우리 밭에 옮겨 심고 그것을 가꾸고 자라면 되파는 원예업을 하시던 우리 아버지



묘목을 구하기 위해 전국방방곡곡을 다니시고 어떻게든 값싼 어린 나무들을 구하면



현장에서 작업해 서울 우리 터전으로 옮기셨는데



주로 지방에서 올라오느라 대체로 늦은 한밤중에 털털털 마루턱을 기어오는 짐차를 기다리느라



어머니와 오빠는 잠들지 못했다.



야트막한 동산처럼 나무들이 가득 실린 트럭이 휘청거리며 도착하면



우리 식구는 총출동해서 나무를 날랐고, 아침이 오면 아버지는 밭에 심는 일을 하셨다



어린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돕겠다고 나섰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면 걸리적거린다고 차라리 들어가 자라고 야단을 치던 오빠 말도 무시하고



나는 내가 들 수 있는 무개의 나무를 한 두개라도 고집스럽게 날랐다







그림과 서예라곤 배운 적이 없는 아버지는 화가 못지 않게 그림을 잘 그리셨다



사실 정원 공사를 위해 직접 설계를 하신건데,



도화지 한 장을 방바닥에 놓고 연필을 잡으시면



그 도화지는 어느새 한폭의 산수화로 변했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빛났다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 사이사이에는 사철 번갈아 피어날 꽃들이



층층 돌을 쌓은 둥지 안에서 어우러져



서로를 바라보고 올려다보며 감싸안는 대가족의 모습이었고,



정원으로부터 대문과 현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다듬이돌처럼 맨질맨질한 돌길이



징검다리로 이어졌고 나머지는 잔디가 심어진 푸른 초장이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이 담에 크면 아버지가 그린 이렇게 멋진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아야지.



지금은 비록 타국에 살지만,



날이 밝으면 숲으로 가서 나무를 보고 꽃을 보면서 그 시절을 회상하는 습관은



그리 나쁘지 않은 유전자 덕이기도 하고 그리움을 캐내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 하리라!



어린 시절의 그 터전처럼 겨울에도 푸르게 빛나는 향나무가 있고



봄, 여름, 가을, 릴레이로 피어나는 꽃이 있고



개나리가 울타리를 친 담장 없는 집에서



아버지가 그렸던 정원을 가꾸며 자연처럼 살고 싶다고,



이것이 내 생애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리는 꿈이라고.







9남매 장남으로 모진 고생을 다하셨던 아버지,



흙에서 손을 놓지 못하셨기에 굳은 살이 박혀 고목 등껍질 같았던 손등과



새우보다 더 굽었던 등. 휘어진 다리.. 점점 작아지던 키와 여윈 몸....



아내를 동생처럼 아끼고, 자식을 보물처럼 사랑하셨던 아버지



비록 부유하지 않았어도 마음은 늘 부자였고 넉넉했던 아버지



자연을 사랑하도록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



국화꽃 향기 맡으며 하늘로 오르신지 벌써 몇 해인가!







가을,



가을이 오면 맨드라미, 과꽃, 국화를 많이 심으셨었다



꽃봉오리 맺히고 꽃잎이 열리기 시작하면



꽃을 길게 꺽어 좀 더 오래 살라고 끓인 소금물에 밑둥을 지져 소독을 하고



단으로 묶어 어머니와 함께 남대문 시장으로 팔러 가셨었다



자가용도 없던 그 시절, 그 무겁고 많은 꽃단을 어떻게 나르셨을까......



얼마나 허리가 아프셨을까....



그럼에도 국화꽃처럼 웃던 아버지,



오시는 길에 그 시절 귀했던 바나나 한 개라도 사다 주시곤 했었지.







가을,



미치도록 사무치는 가을이 오면



그 마루턱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나무를 다듬던 전지가위 소리가 들리고



가을 햇살처럼 따사로운 목소리로 해맑게 웃으며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주변을 돌아보다가 우뚝 걸음이 멈추어지고



타임머신을 타고 오라는 듯 안개가 깔리고 국화향기가 진동을 하면



향기에 이끌려 나의 동산으로 날아가



나무 대신 고구마나 많이 심으라고 철없이 떼를 쓰던 어린 딸의 머리를



껄껄 웃으며 쓰다듬는 아버지를 만나 실컷 투정을 부린다



그리움을 마음껏 풀어도 좋을 아버지 품에서 소낙비처럼 울고도 온다



-- 시인 황현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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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가슴을 울리는 한편의 서정시,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요? 우리 여럿 만났던 그 때 그 자리가 그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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