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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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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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아픈데...
-며느리의 유방암과 100일 기도-

2011. 10. 9. 일요일 아침.
나는 서둘렀다. 오늘 마산 둘째 내외와 손자가 내 집에 오는 날이다. 절을 다녀서 엊그제 개업한 마트까지 둘러 귀가하느라 바빴다. 거의 같은 시각에 마산 아이들과 아파트 마당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둘째 손자는 그 새 많이 컸다. 우리 내외의 화제는 늘 손주들이다. 그리움은 언제나 크게 마련이다. 가끔씩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자 유일무이한 낙이다. 우리내외는 손자를 번갈아 포옹하고 등을 다독거렸다. 어깨가 딱 벌어진 게 영락없는 사내다. 아내는 나날이 커가는 손자들이 늘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지난번보다 더 컸네.’
중학생이 되더니 말수가 적어진 손자 녀석은 그제야 씨~익 웃는다.
‘뒤로 돌아서봐 내랑 키 한 번 재 보자.’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곧추 세운다. 아닌 게 아니라 거의 내 키에 육박했다. 둘째 손자와의 이날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됐다.
둘째 아들이 ‘지금 출발 하시지요?’  
우리 내외는 서둘렀다. 아직까지 거동이 불편한 아내는 둘째 아기가 부축해서 아파트 문을 빠져나갔다. 승용차에 오르기가 바쁘게 김천으로 향했다. 어젯밤부터 마음이 착잡했다. 김천의 외진 산골 휴양소에 있는 맏며느리를 만나기 위한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1시간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김천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곧 2차선 지방도로에 진입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마을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으로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가을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포도는 이미 수확을 끝냈는지 비닐하우스마다 정막감이 흘렸다. 이런저런 단상에 젖어있는 동안 승용차는 꼬부랑 마을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제법 높은 상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의 다왔다는 감이 잡혔다. 그래서 눈길은 산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토록 푸르던 나뭇잎들은 어느새 노랑 옷으로 새 단장을 하였는가. 오늘 따라 단풍잎은 덧없이 쓸쓸했다.
고불고불한 산마루를 오르자 자동차 엔진소리는 가품 숨을 내뿜었다. 자동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은 길을 안내하느라 바빴다. “100미터 앞에서 11시 방향 우측, 50미터 앞 방지턱 조심,” 등등 친절하고 정확했다. 첨단 IT 기술을 또 다시 실감했다.
이곳은 둘째 아기(며느리 애칭)만 두 번째 가는 길이었고 모두 초행이었다. 얼마를 올랐을까 둘째 아기가 ‘저기 보이네요.’라고 했다. 거무스레한 건물 지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그랬다.
‘어떻게 지내는지? 얼마나 좋아졌을까?’ 머릿속은 갑자기 어수선한 혼란에 빠졌다.

3층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았을 때 잔디마당 맨 위쪽 벤치에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자동차 소리가 들렸든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걸음걸이가 큰 아기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자동차는 건물 앞마당의 잔디밭에 멈췄고 아기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어떠냐?’
인사말이 오가는 것은 뒷전이고 먼저 아기의 얼굴부터 뜯어봤다. 안색은 그리 나쁘지 않아 안도했다. 외려 몸이 불어난 것 같아 짐직 ‘더 살쪘네?’라고 했더니 ‘늘 같은데요.’라며 피식 웃었다. 내가 진정 듣고 싶은 말이었다. 암환자에 있어 체중은 그만큼 예민한 징조라는 막연한 상식 때문이었다. 아내는 아기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고생하제...?’ 하더니 눈가엔 어느새 가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기는 얼른 ‘어머니는 좀 어떠신데요?’라며 되물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알아챈 둘째 아기가 안으로 들어가자며 서둘러 시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두 며느리는 아내를 양쪽에서 부축하며 소파가 삐죽삐죽 내다보이는 넓은 창 쪽을 향했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에 넋을 잃고 있었다. 머리를 질끈 맨 검정 스카프가 마음에 걸렸다. 건강한 여인이 매었다면 분명 멋이다. 그러나 머리 수술을 받은 환자가 매고 있는 스카프는 고통의 상징이다. 지난 기억으로 그랬다.  
너무 아픈 두 여인...!! 어찌하여 한 여인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3년째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가 됐고, 40대 후반의 젊디젊은 여인은 유방암 환자의 몸이 되어 이 낯선 산골의 휴양지에 와 있단 말인가?
셋이 휴게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건물을 쳐다봤다. 3층 목조 건물은 깨끗해 보였다. 그 한가운데 ‘힐링라이프(healing life)’란 칭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본 그대로였다. <건강과 행복을 약속드리는 -힐링라이프> 제법 근사한 캐치프레이즈다.

뇌 속을 바늘로 찌르는 아픔을 가다듬으며 며느리가 앉아 있던 벤치로 발길을 돌렸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장년이 신문을 펼쳐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소리 내어 읽고 그 곁에 바싹 붙어 앉은 한 사람은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귓가를 스치는 기사내용은 내가 읽고 큰 아들에게 주었던 조선일보의 ‘라이프’란이었다.
“내가 먼저 갈 테니 뒤에 오느라.”라고 농담할 정도로 낙천적인 사람들이 “내가 죽으면 내 남편은 어떤 여자와 재혼할까?”라며 상상하고 속상해하는 환자들보다 아주 잘 낫더라는 내용의 기사다. 어려울수록 더욱 긍정적인 사고(思考)로 살라는 건강법이 유명 의사들의 입을 통해 정리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심각하게 읽으면서도 입가엔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짐작 컨데 그들도 암 투병자들이 분명했고 그 기사를 통해 희망을 엿보며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며 의지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아마 내 며느리도 그럴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왈깍 눈물이 쏟아졌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머리를 좌우로 크게 흔들고 심호흡을 내뱉으며 건물 뒤편에 올랐다. 산세는 완만했고 산골짜기도 그리 깊지 않았다. 휴양소를 병풍처럼 둘러싼 지형이 괜찮았다. 하루에 두 번씩 오르내리는 산책과 풍욕을 한다는 바로 그 산이었다.  
‘우리 며느리는 이 산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신문기사처럼 “내가 죽으면 내 남편은 어떤 여자와 재혼할까?” 설마 그러지는 않았겠지?
쓸데없는 망상이다 싶어 또 한 번 머리를 힘껏 흔들고 준비해간 카메라로 산과 휴양소 건물을 한 컷씩 찍었다. 그리고 얼른 아이들이 있는 휴게실로 내달렸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큰아기는 창가에, 아내와 둘째 아기는 반대쪽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도 살짝 카메라에 담았다. 입구 쪽 소파에는 둘째 아들과 손자가 바둑판에 흑백 바둑알을 번갈아 놓고 있었다. 오목을 두는 모양이다. 명암이 엇갈리는 모습에서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라며 쓴맛을 곱씹었다. ‘큰 손주들도 저들 엄마와 저렇게 한가로이 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세 고부가 앉아있는 틈새를 비좁고 들어갔다. 멈칫하던 큰아기의 이야기는 곧 이어졌다. ‘오늘 아침에도 중년 여자 암환자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나갔다’는 줄거리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며느리의 표정은 긴장과 두려움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마치 마음을 찍은 X-레이 필름이라도 보는 듯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아기의 심정이 너무도 또렷이 내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오장육부가 아려와 창밖의 먼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순간 나는 ‘이것도 문제네!?’라는 의문표가 긴장을 안겼다. 그런 상황을 보노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얼마나 두려울까? 이런 곳이 최선일까? 오만가지 물음표가 뇌리를 스칠 때 ‘아버지 점심 드시러 가지요.’라는 아들의 말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12시30분, 점심시간이었다. 휴게실 뒤편에 50명쯤 앉을 만큼 제법 넓은 식당에 탁자가 줄지어 있다. 주방 앞 스탠드에는 밥과 찬이 줄지어 놓여 있어 뷔페식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밥은 현미잡곡밥이었고 찬은 가지나물과 부침개와 서너 가지 채소와 김치국이 전부였다. 후식으로 멜론이 널따란 그릇에 먹음직스레 가득 담겨있어 위안이 됐다. 왜냐면 그 게 그 것 같은 채소로만 채워진 식단 때문이다. 채식이 좋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먹어서야 기운을 차리겠나 싶었다. 그래도 그들의 텃밭에서 직접 생산한 유기농 채소라고 하니까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기는 때마다 식단이 바뀐다며 괜찮다고 했다. 우리가 먹을 점심은 둘째 아기가 미리 예약을 하였던 모양이다. 밥값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김치국과 가지나물만 먹었다고 생각하니 돈이 아깝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는 큰아기에게 많이 먹으라고 연신 권한다.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우리 내외는 어젯밤부터 속병을 앓았다. 큰 아들의 집안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3짜리 큰손자는 수능시험 준비로 밤을 지새우는데 옳게 먹이고 챙겨줘야 할 엄마가 산골 휴양소에 있으니 어째야 하는가? 그뿐이 아니다. 큰손녀 역시 시험 준비에 겨를이 없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1년을 마치고 봄 방학 때 귀국하고서는 복학하지 못해서다. 출국 직전에 터진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보낼 수가 없어 일단 휴학하며 향후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 두 학기를 훌쩍 넘겨버린 것이다. 방사능 소동이 아직 끝나지 않아 휴학등록비(일본은 휴학해도 등록비의 일부를 부담함)만 꼬박 치르며 복학은 기약조차 못하는 형편이다.
손녀의 전공은 예능계이기 때문에 유학을 포기할 경우를 대비한 차선책으로 한국종합예술학교에 응시하기로 한 것이다. 창의력 위주의 시험이어서 여간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책만 읽고 외워서 되는 시험이 아니니까 머릿속에는 수많은 그림을 한정 없이 그려 넣어야 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빠야 할 엄마가 휴양소에 있다. 얼마나 아프고 마음조이겠는가. 생각에 여기에 이르면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한다. 그렇다고 아내가 돌봐줄 형편도 못 된다. 아내의 뒷바라지도 바쁜 나 역시 그렇다. 가끔씩 아내는 감자탕과 닭개장을 만들어 손주들에게 보냈었다. 그런데 탈이 났다. 오랫동안 서 있는 바람에 수술한 다리가 아파서 한참 애를 먹었다. 그 이후로 그마져 못해주는 형편이다. 이래저래 늘 아프고 아리는 마음으로 지내는 우리다. 그래서인지 막상 며느리를 만나려 간다니까 만감이 더욱 서글프게 다가왔던 것이었다.
‘어쩌다가 우리 며느리가 저런 못 쓸 병에 걸렸을까?’ 아내의 탄식이다. 나 역시 그렇다. 두 방에서 두 늙은이의 한숨소리가 끊이지 않고 뿜어졌던 지난밤이다.

큰 아기는 그런대로 밥을 잘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내는 ‘어떻든지 잘 먹어야 한다.’며 쉼 없이 다그치며 다독거렸다. 나는 둘째 아기에게 ‘애야 며칠씩 집에 왔다갔다해도 되는 지 좀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오죽 아이들이 걱정되고 보고 싶겠는가 싶어서다. 커피를 한 잔 먹고 있는 사이에 다녀왔다. 며칠 비우게 되면 방에 있는 짐을 일단 빼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여개로 보이는 방이 있지만 실제 투숙중인 인원은 열 댓 명밖에 안되는 것 같아도 그렇게 해야 되는 모양이다. 일단 꼭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길은 알아둔 셈이어서 큰아기에게 알려주었다. 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둘째 아기에게 알아보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다. 이곳을 선택하고, 한 달 이용료 160만원도 둘째 아기가 부담했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참 고마운 둘째 며느리다. 돈보다 가슴이 얼마나 따뜻한가 싶어서다. 다반면의 봉사활동에서 얻은 일면이라 여기면서도 너무 고맙다. 아울러 크게 빚진 기분도 떨칠 수가 없다. 큰 아기는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큰 아기에게 ‘여기가 괜찮으냐?’고 다시 물었다. 식단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다. ‘운동 시설도 있고 족욕도 할 수 있고 웃음 프로그램도 있어 괜찮습니다.’는 대답이다. 본인이 긍정적이니까 한시름 놓였다.
우리가 머문 시간은 불과 3시간 남직했다. 둘째 내외는 공휴일도 아랑곳없이 몹시 바쁜 몸이다. 오늘도 오후 5시부터 스케줄이 잡혀 있다며 동서끼리 속삭였다. 우리 내외는 어쩔 수없이 따라나서야 했다. 발걸음은 천군만근 무거워 땔 수가 없다. 이 깊은 산골짜기에 며느리 홀로 두고 떠난다는 것이 이토록 마음 아플 줄이야 당해보지 않고서는 어찌 상상인들 하겠는가. 주차장까지의 거리는 불과 100여 미터지만 그 길은 참으로 멀고 고달픈 길이었다.
아내는 아까처럼 두 며느리의 부축을 받으며 한 발짝씩 옮기면서 당부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얘야, 집안이랑 애들 걱정은 제발 하지 말고 네 몸 하나만 생각하고 챙겨라. 네가 있어야 자식도 있고 가족도 있는 거야.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운동 열심히 하고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나도 서둘러 말했다. ‘어미야, 암은 불치의 병도 난치병도 아니란다. 꼭 낫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 잘 먹고 더 운동해야 한다. 그리고 책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모든 잡념이랑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려라.’ 말이야 쉽지만 어디 그런가. 하늘이 원망스러울 것이고 미처 챙기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무한할 것이다. 내일이라도 달려오면 금방 만날 수 있는 지척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헤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하고 애달팠다.
아기는 ‘걱정하지 마시라.’고는 말하지만 어디 그런가.
우리는 끝내 자동차에 몸을 실었고 아들은 액셀을 밟았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흔들었다. 손이 서서히 내려가고 서로가 멀어져 갔다. 한동안 뒤돌아보고 또 보았다. 아기는 한참을 서 있었지만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아기의 눈망울이 자꾸 떠오른다. ‘언제 건강을 되찾을까? 남들처럼 희희낙락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만 번씩 좌절과 희망의 구릉을 오르내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잊어버리자. 이렇게 아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쉬 지워지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고 탐스러울 수가 없다. 아내가 그렇고 며느리 또한 기를 펼 수 없기 때문이다. 2시간 반을 달리는 차속에서도, 집에 도착한 뒤에도, 아기의 쓸쓸한 잔영은 영 지워지지가 않았다.
“내가 이토록 이렇게 아픈데 저는 얼마나 아플까?”

2009년 10월 17일 토요일,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은 날이다. 큰며느리가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는 전화였다. 그것도 암 크기가 3.5cm라는 큰아들의 목소리는 경악과 절망감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우리 내외는 망연자실했다. 할 말을 잃었다. 참으로 암담하고 난처했다. 그리고 화도 났다. 그렇게 크도록 왜 몰랐을까? 10여 년 전 유방섬유종 수술도 받은 병력이 있고 친정어머니와 이모들도 섬유종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느냐는 탄식이 꼬리를 문다.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싱가포르에서 무슨 수를 쓰겠는가? 설렁 옆에 있다한들 별수 없는 노릇이지만 다독거려 줄 수조차 없는 처지니 기가 막혔다. 나는 곧 인터넷에서 유방암을 찾았다. 가장 잘 낫는 암이라는데 우선 위로가 되지만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심란하고 조급했다. 그저 발만 동동거리며 연방 전화기만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애야, 어떻게 하려하나?
‘서울아산병원으로 가려고 합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너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요즘은 그리 걱정 안해도 된다니까...’
‘언제 귀국한다고 하셨지요?’
‘11월 3일, 그러니까 얼마 안 남았어.’
큰아들과의 대화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봐도 캄캄하다. 아내는 1년 전인 지난해 교통사고의 소송문제로 수술 받은 병원에서 재진단을 받기위해 싱가포르에 최근에 들어왔었고, 소송도 가해자가 엉뚱한 거짓말을 해대는 바람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덮치고 겹친 사면초가다. 나는 병원과 변호사 사무실과 손자 학교까지 두루 다녀야 했고 항공권도 문제가 돼 항공사도 다녀야 했다. 애가 타고 짜증스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곧 귀국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 내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만 푹푹 쉬며 ‘이 일을 어쩌나, 이 일을 어쩌나.’만 연거푸 내뿜었다. 며느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 힘이 없지 않는가?’ 이토록 막막하기만 한 자신을 비웃고 매질했다.
큰아기가 최종 암 선고를 받고 치료 스케줄이 잡힌 것은 10월 26일 서울아산병원에서였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형병원인데다 암 전문센터니까 제아무리 독한 암이라도 곧 퇴치될 것이라 믿고 의지했다. 아이들에게도 할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암 덩어리가 커서 당장 수술은 할 수가 없고 먼저 항암치료부터 받은 뒤에 수술을 한데요.’
‘그래, 큰맘 먹어라. 잘 될 거야.’  
큰아들로부터 전해오는 소식은 늘 서글프고 암담했다. 대답 역시 맨날 제자리에서 돌고 도는 회전문이었다. 얼마나 기막히고 답답할까?
그 와중에서 나는 나의 일을 해야 했다. 다름 아닌 한국촌 싱가포르생활기에 연재하는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였다. 누가 맡긴 일도 아니었고 졸라대는 것도 아니었지만 때를 거를 수는 없었다. 안절부절 하면서도 11월3일 저녁 <그대, 싱가포르여! 안녕>의 최종분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세 번을 올렸었다. 싱가포르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것도, 아기의 암 소식을 안고 떠나야 하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참으로 착잡하고 우울했던 그 때다.  

귀국은 했지만 며느리를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 완치 될 거야.’만 되뇌며 속절없이 바라만 봐야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귀국한지 채 한 달이 안 된 26일, 아내가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또 골절상은 입은 것이다. 싱가포르 교통사고로 골절된 바로 그 다리다. 입원 다음 날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 중인 큰아기가 머리에 검정스카프를 질끈 동여매고 시어머니의 병실을 찾아왔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 가발을 쓰고 스카프로 가린 것이다. 그 때부터 검정 스카프는 보기 싫었다. 다리를 두 번이나 연달아 부러뜨린 시어머니, 공포의 암에 걸린 며느리, 두 사람을 보노라니 숨이 막혔다. 신의 장난도 지나치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다. 문제는 아내와 며느리의 번갈은 우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가? 내가 남몰래 흘린 아린 눈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의 고통사고로 대성통곡을 했었고, 곧 이은 아내의 급성담낭염 수술로 두 번 울었고, 며느리의 암 소식으로 세 번 울었고, 아내의 골절 재현으로 네 번 울었다. 세상에 이런 울보가 또 있을까? 얼마나 더 울어야 끝이 날까? 가슴은 탈대로 탔다. 때로는 ‘애라 모르겠다.’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컴퓨터 좌판만 두드리기도 했다. 그 무엇인가에 심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언론사에 기고도 하고 시와 수필도 써댔다.
그러나 불행의 악연은 쉽게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도 세월은 잘도 갔다.
2010년의 문이 열리자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했다. 아니, 그렇게 기대고 싶었다. 며느리의 암이 완치되고 절룩거리는 아내 다리도 원상회복될 것으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한 인간의 바람일 뿐이었다. 항암치료 중이던 큰 아기가 급성폐렴으로 사경을 헤매는 또 한 번의 시련에 부딪쳤다. 아기를 보자마자 머리끝이 삐쭉삐쭉 서고 온몸에 소름이 꽉 끼쳤다. 창백한 얼굴에 거친 숨소리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폐에 혹이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기겁을 했다.
‘이 일을 어쩌나!’ 하늘을 원망했다. 그러나 원망은 잠깐이고 무조건 빌었다. 부처님에게도, 하느님에게도 아니었다. 그저 허공에 대고 ‘낫게 해주십시오. 꼭 나아야 할 사람입니다.’만 부르짖었다. 천만다행이도 입원 닷새 만에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이되지도 안했고 폐렴도 완치되었다. 마지막의 혹독한 시험이라 여겼다.

5월 3일, 큰며느리는 수술대에 누었다. 시술은 잘 끝났고 회복도 양호했다. 남은 것은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었다. 머리칼이 거의 정상으로 길었을 즈음 영어 과외교사로 뛰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정상인으로 생활하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부르는 집이 많아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고 했다.
아내도 재활치료를 잘 받고 있어 이제 모진 고비가 다 지나갔다 싶었다. ‘한국촌’에 연재하던 ‘사람 사는 이야기’도 속도를 내어 썼다. 하지만 고민꺼리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통사고 2년이 될 때까지 치료비와 위자료 소송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3천만원 가까운 치료비조차 한 푼 받지 못하고 ‘누구의 과실이 더 크느냐’에 시달려야 했다. 변호사도 한계가 있어 그 모든 기본 입증자료는 내가 모두 제시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귀국 이후의 치료비와 간병비, 재활치료비 등을 청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상대보험사인 AIA는 시간 끌기만 했다. 지치고 화났다. 사실은 2차 골절사고는 1차 사고로 인한 허약한 뼈 때문이었지만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타국과의 싸움은 그렇게 불리했다. 주싱가포르 한국대사관과 한인회장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끝난 시점이 2010년 11월이다. 치료 실비만 받고 포기한 것이다. (교통사고 조심하세요)
아내는 두 번의 수술로 인한 보조철판 때문에 다리가 늘 시리고 아팠다. 더 큰 문제는 다리가 휘어져 똑바로 걸을 수 없고 절름거리는데 있었다.
그렇지만 큰아기가 예전처럼 씩씩하게 다닌다는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서 아내에게 늘 말했다. ‘당신만 원상회복되면 불행 끝이야.’ 나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 할아버지의 애틋한 가족사랑 이야기’를 펴냈다. 싱가포르 생활 이야기가 주류였다.
“고통은 도전을 부여했고 시련은 기회를 제공했다.”
내친김에 두 번째로 ‘길을 묻는 당신에게’도 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이 발간되기 직전인 2011년 5월 26일, 아내의 다리교정수술을 받아야 했다. 휘어진 대로 두면 절 수 밖에 없는데다 3년 이내 무릎관절이 망가질 확률이 높다는 진단 때문이었다. 벌써 다리 수술만 세 번째다. 그래도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잘 하자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내는 힘겨워했다. 여러 번 생살에 칼을 댄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지겨운 것이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기에 아픈 마음은 누가 더할 것도 없이 하나같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해서 기뻤다. 3개월 뒤쯤이면 걸을 수 있다고도 했다. 아내는 수술 2주 만에 퇴원했다. 뼈가 잘 붙기만 하면 3년 동안의 모든 우환을 모두 청산하는 기분이어서 참으로 상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희망사항이었다.
6월 21일, 큰며느리의 유방암이 머리로 전이되었다는 숨 가픈 전화를 받아야 했다. 청천벽력도 유분수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불운은 불운을 부른다고 했던가? 지칠 대로 지쳐버려 할 말도 없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듯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쩌자고 이런 일이...,’
우리 내외는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애써 움켜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자제력도 그리 오래가지를 못했다.
‘어이 불쌍한 것, 그렇게 잘 살아보겠다고 밤낮없이 뛰더니만...,’ 아내는 끝내 휠체어 위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나도 덩달아 울먹였다.
서울아산병원에서 날아드는 전갈은 나날이 우울한 소리였다. 후두부에 생긴 암의 크기가 무려 4.7센티라는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머질 것만 같았다. 불과 세달 전의 정기검사에서 그것도 찾아내지 못한 병원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참자. 지자.’ 이렇게 살자하였는데 도저히 참고 지고말 수가 없었다. 당장 상경하여 의사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곧장 주저앉고 말았다.
‘급성으로 오는 것은 의사들도 어쩔 수 없답니다.’ 큰 아들의 말이다.
두세 달 사이에 탁구공만큼이나 자란다? 과연 그럴까? 하기야 머리가 조금씩 아프다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수궁해야 했다. 입원 1주일 뒤인 28일, 장장 7시간 예정의 수술에 들어간다고 했다. 우리 내외는 장시간의 뇌수술이라는데 바싹 긴장하고 마음 조였다.
‘제발 아무 탈 없이 수술이 잘 끝나야 할 텐데...,’ 간절히 빌었다.
‘수술은 잘 되었답니다. 머리 바깥쪽에 있었고 경계선도 분명해 더 전이될 가능성은 낮다고 합니다.’
수술시간도 한 시간 단축되었다는 큰아들의 전화를 받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눈이 빠져도 그만하기 다행이다 하였던가.

내가 100일 새벽기도를 시작한 것은 아기 수술 예정일 열흘 전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도 내가 내 며느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꼭 무엇인가를 해야 할 테인데...,’ 고민 끝에 문뜩 떠오른 것이 우리 집에서 3킬로쯤에 위치한 사찰이었다.
6월 18일 새벽 4시 반,
적막이 흐르는 밤거리에 나섰다. 사방은 어두웠지만 거리는 깨어있었다. 자동차의 엔징소리가 그랬고, 군데군데 환한 가로등이 그랬다. 차들은 신호등도 무시하고 달렸다. 예전 같으면 ‘저저저’라며 혀라도 찼겠지만 전혀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가 은근히 겁났다. 아내의 교통사고 이후 자동차에 대한 공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30여분을 걸었을 때 예전에 내가 살던 범어동 체육공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채 5시도 안됐는데 드문드문 한 사람씩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역시 운동이 대세구나’ 하면서 땀방울을 훔쳤다. 곧 사찰의 거대한 팔작지붕이 눈에 들어 왔다. 촛불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가 했더니 독경소리도 은은히 들였다. 참 오랜만에 맞닥뜨리는 인연의 순간이었다. 일주문 앞에서 합장반배하고 법당으로 향했다. 오른쪽 샛문이 열려 있었다. 법당의 부처님을 향해 합장했다. 곧 축담 밑에 신발을 벗어 바깥쪽으로 가지런히 모아놓고 오른 쪽 발부터 법당에 들여놓았다. 황금빛 찬연한 불보살님 앞에 서자 어깨는 천근만근의 무거움으로 짓눌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숙연하고 청아했다. 법당을 환히 밝히고 있는 촛불은 가엽은 중생을 손짓하듯 하늘거렸다. 향로에 향을 피워 꼽고 불전을 공양했다. 불보살님께 삼배(三拜)하고 좌우 신중단에 이배(二拜)했다. 인터넷에서 급히 찾은 예법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뇌며 엎드렸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비나이다. 우리 큰며느리 오○○을 구해주옵소서. 못 쓸 병을 거둬가 주옵소서. 그래서 하루 속히 완치되게 하여 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간절히 바라옵고 간곡히 비나이다. 아기의 고통과 시련, 지금 끝내 주시어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옵소서. 그래서 저들 가족이 모두 건강하고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가정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우환이 이 중생의 죄업이라 여겨집니다. 알게 모르게 저지르고 쌓인 모든 죄업 다 씻어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절실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담아 정성을 다해 빌었다. 현기증이 날 때까지 부처님 앞에 엎드렸다. 30여분이 걸렸다. 체력의 한계인가? 아무래도 모자라는 것 같았으나 100일을 위해서 무리하지는 않기로 했다. 사용했던 반석을 제자리에 갔다두고 부처님 앞에 다시 섰다. 선채로 다시 한 번 더 빌었다. 밖을 나서는데 여신도 한 분과 마주쳐 합장 인사했다. 들어올 때처럼 나올 때도 합장반배 했다. 날은 환히 밝았고 산책객의 왕래는 활기찼다. 내 집사람도 저래야 하는데...,
공원 숲속의 새벽 공기는 시원하고 산뜩하다. 집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쌀을 씻어 밥솥에 안쳤다. 아내가 거동이 불편한 때부터 가사는 몽땅 내 몫이다. 웬만한 반찬도 아내의 지도에 따라 제법 잘 해냈다. 그 다음날 새벽, 또 다른 기도가 시작됐다.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관세음보살 며느리 완치’를 되뇌었다. 1만 번을 말하면 소원성취가 된다는 인도의 속담을 믿고 싶어서다. 왕복 7천보 정도니까 하루 대충 5천 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틀이면 만 번이다. 그리고 절에서의 기도주문도 하나 더 추가해 아내의 완쾌도 빌었다.
날마다 새벽잠을 뿌리치고 꾀나 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때로는 힘들었다. 일어나는 시간을 맞추느라 늘 긴장해야 했다. 짧은 여름밤에 두세 번씩 시간을 확인하다보면 두세 시간밖에 잘 수 없기 마련이었다. 두 달쯤에 이르자 현기증과 무력감이 엄습했다.
‘혹시 길바닥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하지만 이를 악물며 걸었다. 사투를 벌리고 있는 며느리를 생각하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내야 살만큼 살았는데...’ 대신할 수만 있다면 어찌 늙은 목숨 하나 내놓지 못하겠는가. 그럴 수 없기에 쉽게 내뱉는 말이 아니다. 기꺼이 그럴 것이다. 어버이의 마음이란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100일 기도를 마친 날이 10월 25일 엊그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오늘이 이 죄 많은 중생이 부처님께 기도한 지 백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빌고 바랐던 간절하고 절실한 소원, 모두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은 더 많은 주문으로 더 많이 빌고 또 빌었다. 한여름에 시작한 기도가 가을 한복판에서 끝난 셈이다. 소원을 담아 흐른 세월이어서 고맙고 감사했다. 절문을 나서는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시원했다.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더 힘차게 ‘관세음보살 며느리 완치’를 반복하며 낙엽을 밟았다.
서둘러 집에 갔다. 한 달 반 만에 병원에 가는 날이다. 바싹 긴장됐다. 오늘의 결과에 따라 재수술을 해야 할이지, 그대로 치유될 수 있을 지, 판가름 나기에 그랬다. 당초 3개월이면 낫겠다던 예상이 빗나가면서 재수술 이야기가 나왔던 터다. X-레이를 찍고 초조히 기다렸다. 10시, 떨리는 가슴을 쓸어안고 주치의 앞에 앉았다. 모니터를 살펴보던 주치의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나아지고 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 역시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다. 꼭 듣고 싶었던 한마디를 들은 것이다.  
‘아기도 이래야 하는데...,’ 며느리의 완치 판정이 더욱 간절하게 스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은 가벼운 마음으로 귀가했다.
사실 나는 무교인(無敎人)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였고 막내 동생은 유명 목사지만 왠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100일 기도를 택한 것은 어머니의 49재를 바로 이 절에서 지낸 인연 때문이었다. 어쨌든 홀가분하고 산뜻한 날이었다.

20일 전 만나고 헤어지던 그 때의 아기 얼굴이 스친다. 얼마나 아파할까? 아들과 손녀 손자는 또 얼마나 아플까? 얼마를 더 아파야 할까? 내 생애에 있어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의 검정 스카프를 떠올리며 이렇게 되묻는다.
‘잘 될 거야. 머지않아 완치될 거야. 꼭 그래야 돼...,’ 이 또한 단 한 시도 빠뜨릴 수 없는 일과의 중심이다. 그리고 확신한다. 아기는 아무 죄가 없다. 순수하고 정직한 품성인데 하늘인들 어찌 무심하겠는가.
하늘이시여! 이 단장의 아픔을 하루속히 걷어가 주옵소서.
내가 이토록 아픈데.....
손주에게 보낼 감자탕을 지금 한창 끓이고 있다.

                                                                                                               <33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참 망설였던 글입니다. 나의 우울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싫었습니다. 그러던 어제 불현 듯 쓰고 싶었습니다. 인생에 있어 불행은 누구에게나 이미 장착된 시한포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상관없이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것이라 여겨져서 말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끊임없이 성찰하고 자신을 아끼라고..., 오로지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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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구름에 달가듯이님의 댓글

구름에 달가듯이 (jxkk)

선생님께서 아파하시는 만큼, 또다른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라 믿습니다.  힘드시더라도, 항상 겸손함과 선량한 마음 잃지 마시고, 고통을 잘 인내하셔서 새로운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Jsing님의 댓글

Jsing (paik1220)

한국에 온 지 넉달이 넘어 갑니다. 내년 1월에 다시 입싱할 예정이라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며느님얘기에 가슴이 아프네요.
하지만 삶에대한 의지가 중요하다지요.
자연으로 돌아가 모든음식을 자연에서 얻고 삼림욕이 굉장히 좋답니다.
저의 아빠도 암으로,그 외 적지 않은 지인들이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기존의 병원에서의 치료보다 오히려 자연치료가 더 효과가 있다고 그럽니다. 이미 서양에서도 그걸 인정하는 추세라네요. 병원 열심히 다니시고 산에도 열심히 다니시면 며느님 반드시 쾌차 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건강하세요.
하늘도 두분이 며느리에 대한 마음 충분히 아실 겁니다.

coriander님의 댓글

coriander (hujoo)

꼬박꼬박 읽지는 않았지만 가끔 쓰신 글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참 감사하게 보았습니다. 문뜩 편찮으신 친정 엄마가 떠오르고 만감이 교차하네요..  끝도 없는 힘든 일,, 알고 보면 집집마다 다 있더군요. 힘내시고 건강 조심하셔서 걱정없는 노후되시길 바랍니다.

투썬즈님의 댓글

투썬즈 (jungsoowoo)

어제밤에 자려다가 잠깐 들른 한국촌에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밤새 뒤척였습니다. 선생님이 쓰신 소설이 아닐까
몇번이나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 기막힌 일이 있었음에도 그동안의 선생님 글에선 전혀 알아챌 수 없었으니까요.  선생님 말씀대로 말꺼내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축원의 기도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생님께만 이런일이 생긴거라고 나쁜일만 계속된다고 생각지 마십시요. 주변에 암환자는 많습니다. 저희 친정아빠도 암수술 받으셨구요. 며느리분 아직 젊으신데 꼭 이겨내리라 믿고요 용기 내시라고 하고 싶네요. 인간이 참으로 나약한 존재 인가 싶어요. 병 앞에선 신 밖에 찾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막말로 목숨 생명이라는게 인간의 의지로는 되는게 아니니까 신께 맡겨놓으십시오. 할머니께서도 생각보다 더 많이 아프셨던거 같습니다.손주들을 챙기지 못해주셔서 마음이 더 아프셨겠습니다.가족의 사랑으로 본인의 의지로 꼭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셨을 겁니다. 선생님 앞으론 더이상 우실일 없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비록 먼곳에 있는 모르는 사람의 기도이지만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용기내시는데에 도움이 되었음 좋겠습니다.

한국인님의 댓글

한국인 (jmhand88)

이렇게 힘든 시간이 있으셨네요... 힘내시고 용기 잃지 마세요. 며느리님,할머니 빨리 나으시기를 기도 합니다. 꼭 완쾌되실겁니다.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고마우신 다섯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조언과 격려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PC를 사용할 수 없는 곳에 있느라 답글이 늦었습니다. 한 분 한 분께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앞으로는 슬픈 사연일랑 쓰지 않겠습니다. 아무쪼록 모두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충심으로 빌겠습니다.

ezer님의 댓글

ezer (anna0710)

마음아픈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나 따뜻하고 선생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손주를 그렇게 따뜻하게 정성껏 보살피시더니 며느님과 할머니 .....선생님의 기도가, 가족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모든걸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의 주역으로써 많은 따뜻한 글, 힘든사람들에게 힘들때 더욱 사랑할수있는 글을 쓰실날을 기대하며 두분의 완쾌를 빕니다. 아직까지 두분이 선생님의 사랑과 위로가 필요하십니다. 힘내시고 건강하세요.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ezer님, 감사합니다. 저의 힘들고 아픈 마음을 이토록 따뜻하게 보듬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때도 있지만 행복 또한 함께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닉네임을 처음 접하는 것 같은데 저 글을 보아오셨군요. 명년 봄쯤 좀 다른 각도에서 쓰고 있는 책을 펴낼 예정입니다. 끊임없는 성원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줄리앙님의 댓글

줄리앙 (kofather)

며느님의 빠른 쾌차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남강 선생님께서도 건강 하시기를 기도할께요.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줄리앙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이름만 봐도 반갑군요. 글을 올려놓고 보니 괜히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아 미안하고 부끄럽군요. 다만 세상사 이럴 수도 있으니 각별히 건강 잘 챙기고 편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하는 노파심에서 올린 것이랍니다. 기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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